<?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title="XSL_formatting" type="text/xsl" href="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plugins/posco-rss/posco-rss.xsl"?><rss version="2.0"
     xmlns:content="http://purl.org/rss/1.0/modules/content/"
     xmlns:wfw="http://wellformedweb.org/CommentAPI/"
     xmlns:dc="http://purl.org/dc/elements/1.1/"
     xmlns:atom="http://www.w3.org/2005/Atom"
     xmlns:sy="http://purl.org/rss/1.0/modules/syndication/"
     xmlns:slash="http://purl.org/rss/1.0/modules/slash/"
	>
	<channel>
		<title>남기고싶은이야기 &#8211; 포스코뉴스룸</title>
		<atom:link href="https://dev-newsroom.posco.com/kr/tag/%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feed/" rel="self" type="application/rss+xml" />
		<link>https://dev-newsroom.posco.com/kr</link>
        <image>
            <url>http://www.posco.co.kr/homepage/images/kor5/common/h1_posco.png</url>
            <title>남기고싶은이야기 &#8211; 포스코뉴스룸</title>
            <link>https://dev-newsroom.posco.com/kr</link>
        </image>
        <currentYear>2018</currentYear>
        <cssFile>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plugins/posco-rss/posco-rss-xsl.css</cssFile>
        <logo>http://www.posco.co.kr/homepage/images/kor5/common/h1_posco.png</logo>
		<description>What's New on POSCO Newsroom</description>
		<lastBuildDate>Tue, 08 Apr 2025 14:12:14 +0000</lastBuildDate>
		<language>en-US</language>
		<sy:updatePeriod>hourly</sy:updatePeriod>
		<sy:updateFrequency>1</sy:updateFrequency>
					<item>
				<title>[남기고싶은이야기98] 정길수 前 부사장, 해외 첫 STS일관밀 완성 “실패하면 양자강에 빠져 죽겠다”</title>
				<link>https://dev-newsroom.posco.com/kr/%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98-%ec%a0%95%ea%b8%b8%ec%88%98-%e5%89%8d-%eb%b6%80%ec%82%ac%ec%9e%a5-%ed%95%b4%ec%99%b8-%ec%b2%ab-sts%ec%9d%bc%ea%b4%80/</link>
				<pubDate>Fri, 17 Aug 2018 09:00:05 +0000</pubDate>
				<dc:creator><![CDATA[posconews]]></dc:creator>
						<category><![CDATA[사람과문화]]></category>
		<category><![CDATA[남기고싶은이야기]]></category>
									<description><![CDATA[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class="aligncenter wp-image-51804 size-full"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1.png" alt="해외 첫 STS일관밀 완성 &quot;실패하면 양자강에 빠져 죽겠다&quot; 정길수 전 부사장 정길수 부사장 모습" width="960" height="491" srcset="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1.png 960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1-800x409.png 800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1-768x393.png 768w" sizes="(max-width: 960px) 100vw, 960px" /><br />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p>
<p><strong>ㅣ급작스럽게 중국에 부임한 후 12년간 장가항에 몸담아 </strong><br />
<strong>ㅣIMF 여파로 취소 위기 맞은 장가항 프로젝트 뚝심 있게 밀어붙여 착공 </strong><br />
<strong>ㅣ꽁꽁 얼어붙은 자금 조달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천신만고 끝에 성사 </strong><br />
<strong>ㅣ1999년 1기 준공 후 설비 확장 지속해 100만 톤 체제 완성 </strong></p>
<p>1996년 4월 싱가포르에서 국제철강협회(IISI, 지금의 worldsteel) 임시이사회가 열렸다. 1994년 10월부터 동남아철강협회(SEAISI) 사무총장을 맡아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 주재하고 있던 정길수 전 부사장은 싱가포르로 가서 김만제 회장 등 IISI 임시이사회 참석 차 현지에 온 포스코 요원들과 저녁 자리를 함께했다. 그 자리에서 김만제 회장은 그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건넸다.</p>
<p>-정 사무총장 당신, 다시 상하이로 가야겠네.</p>
<p>가볍게 던지는 말투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지난달까지만 해도 말레이시아 현지에서 포스코가 추진할 만한 프로젝트를 찾아보라고 미션을 내리곤 했던 김만제 회장으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이건 뭔가 간단치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스치는 것이었다.</p>
<p><strong>나라 안팎으로 격동의 시기, 급작스럽게 중국 부임 결정돼</strong></p>
<p>“1980~90년대는 포스코나 대한민국, 그리고 전 세계가 심지어 나 개인적으로도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거대 제국 소련의 정권을 장악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른바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이끌었고, 우리나라도 오랜 진통 끝에 5년 단임 정권이 이어지는 체제가 고착되었지요. 그때 나는 1989년 4월 소련, 동유럽, 중국을 담당하는 대외협력부 대외협력2과장을 맡았다가 곧 차장이 되었고, 또 7개월도 채 안 돼 비서실 차장 명령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2년 남짓 있다가 간 곳이 상하이사무소였어요. 그런데 거길 떠난 지 2년도 안 됐는데 또 상하이로 가라니 나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죠.”</p>
<p>당시 혼자 말레이시아에서 외떨어져 있던 삶은 매우 외로웠다고 그는 기억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포스코와의 연락도 뜸했을 뿐 아니라 다른 해외 사무소와의 유기적인 관계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포스코의 조직이었으면 이런저런 일로 서로 연락이 취해졌겠지만, 동남아철강협회 소속으로 되어있다 보니 별다른 정보 교환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본사 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p>
<p><strong>모두가 나자빠졌던 장가항 프로젝트 맡아 12년간 매진 </strong></p>
<p>“저녁식사를 마치고 혼자 빠져나와 상하이에 전화를 해봤더니, 거기서는 다들 짐작하고 있더군요. 장가항에 중국과의 합작회사가 설립됐는데, 아마도 그리로 가서 일하라는 것 같다는 것이었어요. 자세히 알아보니 GI(아연도금강판)공장과 스테인리스 냉연공장이었는데, 1995년 12월 22일 당시 김종진 사장께서 현지에 들러 합작회사 설립 서명까지 한 상태였습니다. 내가 상하이사무소장으로 있을 때 우선 코일센터부터 운영하다가 차츰 냉연공장 건설로 가자고 본사에 건의한 바 있었는데, 바로 냉연공장부터 시작하고서는 나더러 그리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p>
<p>알고 보니 그에게 그런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장가항 일을 맡아 할 만한 사람들 4~5명과 접촉했으나 모두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식으로 나자빠져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김종진 사장께서 이미 상하이사무소장으로 일한 바 있고, 지금 동남아철강협회에 나가 있는 정길수가 있지 않으냐, 그 친구를 보내라, 이렇게 된 것이었다.</p>
<p>이때부터 당장 들어오라는 본사 해외사업본부의 성화가 빗발쳤다. 말레이시아의 관계 회사나 기관에 이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6월 초에 귀국해 포스코센터 25층에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고, 계획서를 만들고 찢고 하는 작업을 계속하다가 우선 현장이나 봐야겠다는 생각에 6월 10일 장가항으로 들어갔다. 이후 2008년 2월까지 중국 장가항 프로젝트를 끼고 살았으니 그는 무려 12년 동안이나 장가항에 몸을 묻어야 했다.</p>
<p>당시 중국은 등소평이 개혁ㆍ개방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이 정책은 처음에는 중국 사회에 먹히지 않았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추진동력을 얻기 시작했는데, 이후 가속이 붙으면서 상하이는 시가지 전체가 공사판으로 변해 있었다.</p>
<p>“상하이에서 서북쪽 147km 지점에 장가항이 위치해 있는데, 논두렁길, 밭두렁길이나 다름없는 울퉁불퉁한 도로를 4시간 이상 달려야 했습니다. 타이어 펑크가 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할 만큼 오지 중의 오지였어요. 인구 50만 정도의 내륙 도시로, 호텔도 없었습니다. 거기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연산 150만 톤 규모의 조그만 선재공장이 있었는데, 이 회사가 바로 우리의 합작 파트너사인 사강집단(沙鋼集團)이었습니다.”</p>
<p><strong>합작사인 사강집단 심문영 총경리와의 첫 만남 잊을 수 없어 </strong><br />
<strong>중국 관례 따라 그 자리서 독주 12잔 연거푸 들이켜고 신뢰 얻어 </strong></p>
<p>장가항은 양자강 남안(南岸)에 접한 내륙 항구 도시였다. 주변의 산업 발전 정도나 도시 형성 속도에 비해 스테인리스 수요산업이 꽤 발달돼 있었다. 포스코는 그 시장을 장악한다는 생각으로 장가항 프로젝트를 구상한 것이었다. 점심때가 되어 사강집단의 심문영(沈文榮) 총경리는 한국에서 찾아온 손님, 정길수 전 부사장을 포함해 모두 12명을 대형 테이블에 둘러 앉혔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 앞에는 맥주 잔보다 조금 큰 잔이 놓였고, 중국의 유명 고급술 ‘우량예’가 등장했다. 알코올 52도의 독주 우량예가 잔에 찰랑찰랑할 만큼 따라졌다.</p>
<p>“처음 만난 사람들이 서로 친구가 되려면 최소 석 잔을 마시는 것이 중국의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낮 12시부터 1시까지 그 자리에서 12잔을 마셨어요. 중국의 그런 관행, 그런 문화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사업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조바심이 그날 나를 주당으로 만들었던가 봐요. 그 자리에서는 술만 마시고 특별한 얘기는 없었는데, 나중에 들은 바로는 심문영 총경리가 내가 연거푸 12잔을 마시는 걸 보고 ‘저 친구와는 같이 일해도 되겠구나’ 하고 판단했다는 거였어요. 이런 음주 관행을 통해 사업을 추진시키는 중국의 문화가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합리성을 그 속에서 찾아내는 눈을 가졌다고 봐야겠지요.”</p>
<p>포스코 80%, 사강집단 20%의 합작 비율로 이미 큰 그림이 그려져 있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사업 추진에 들어가기 전에 일종의 선의의 기싸움을 벌인 것으로 그는 이해했다. 당시 포스코 본사에서는 ‘정길수는 이제 죽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법인도 만들어지기 전에 사업을 추진시켰는데, 그 오지에다 무슨 공장을 짓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은 손을 털고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p>
<p><strong>1997년 법인 설립 후 찾아온 IMF의 파고 </strong><br />
<strong>간신히 프로젝트 취소 위기 넘겼으나 자금 조달 막혀 난항 </strong></p>
<p>“1997년 2월 15일에야 법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전 1년 3개월 동안은 소속도 없는 유령 인물로서 작업을 진행시킬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해 하반기 들어 이상한 조짐이 감지되는 겁니다. 상반기만 하더라도 외국계 은행 상하이 지점장들이 서로 ‘우리 돈 갖다 써라’며 장가항까지 접근해 오곤 했었습니다. 그땐 돈은 필요할 때 빌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각종 인허가, 공장 건설, 설비 도입, 인프라 구축, 공기 단축 등에만 매달려 있었어요. 금융 업무는 뒤로 밀쳐두고 있었던 거지요.”</p>
<div id="attachment_51814" style="width: 970px" class="wp-caption aligncenter"><img class="wp-image-51814 size-full"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4_1.png" alt="1997년 2월 당시의 장가항포항불수강 부지.공장이 들어설 부지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width="960" height="492" srcset="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4_1.png 960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4_1-800x410.png 800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4_1-768x394.png 768w" sizes="(max-width: 960px) 100vw, 960px" /><p class="wp-caption-text">▲1997년 2월 당시의 장가항포항불수강 부지. 1996년 7월 포스코이사회의 승인을 받은 후 중국 사강집단과의 합작회사 소재지로 장가항이 결정됐다. 당시 장가항은 인구 50만 명 정도의 소도시였으며, 공장이 들어설 부지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황량한 벌판이었다.</p></div>
<p>그런데 8월부터 은행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당시 국내는 물론 해외의 주요 금융시장에서는 한국에 곧 외환위기 사태가 도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는 긴밀한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그러한 국내 상황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p>
<p>“그때 베네수엘라 포스벤(POSVEN)이 8월 중으로 홍콩에서 기채(起債)를 하고 그다음으로 장가항이 해야 하는데, 점점 밀리기 시작하더니 12월에야 포스벤이 겨우 홍콩에서 돈을 빌린 후 장가항에는 소식이 뚝 끊겼어요. 본사에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혼자 발로 뛰는 수밖에 없다 싶어 1997년 12월 23일 아침 푸동의 HSBC은행을 찾아갔는데, 가는 중에 라디오에서 ‘한국의 국가 신인도가 2단계 강등된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는 겁니다. 그래도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지 못했어요. 기업이나 국가의 신인도야 떨어지기도 하고 오르기도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었죠.”</p>
<p>푸동 HSBC에 가서야 희미하게나마 사태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내 여직원은 그를 허름한 사무실로 안내한 뒤 말이 없었다. 1980년대에 근무했던 멕시코에서도 그랬지만, 중국에서도 은행을 찾아가 ‘포스코’에서 왔다고 하면 은행 지점장실에 접한 VIP실로 안내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상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p>
<p>그렇게 5분여를 더 기다려도 말이 없더니, 한 직원이 노란 텔렉스 용지를 들고 와 보여주며 장가항에는 대출하지 말라는 본사의 지시가 있었다고 간단히 설명한 후 인사도 없이 휙 가버렸다. 그가 겪은 IMF 외환위기의 시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은행 문을 나섰다.</p>
<p>“거리에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그렇게 처량하게 들릴 수 없었습니다. 천지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그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 다음 해 1월 본사에서 전문이 왔는데, 내용이 이랬어요. ‘장가항 프로젝트를 캔슬 또는 지연시키는 것을 검토하라’. 문장에 ‘지연’ 또는 ‘검토’라는 말이 들어있기는 했지만, 구색을 맞추는 말에 불과했고 사실은 ‘캔슬’ 즉, 사업을 접으라는 지시였습니다.”</p>
<p>당시 장가항 프로젝트에는 포스코건설이 턴키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제철소 건설 경험이 많은 데다 엔지니어링 전반을 맡고 있었으므로 설비 사양이야 어차피 뻔하다고 보고 여러 설비 메이커에 자기네 생각대로 설비 제작을 의뢰해 놓은 상황이었다.</p>
<p>당시 중국 정부는 1997년 말까지 들여오는 외자 설비에 대해 면세 혜택을 주었기 때문에 포스코건설로서는 이 큰 혜택을 포기할 수 없어 더더욱 서둘러 제작을 맡긴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설비의 60% 이상이 이미 임시 야적장에 도착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업을 캔슬 또는 지연시켰을 경우의 페널티를 계산해 보니 1억 2000만 달러에 달했다.</p>
<div id="attachment_51810" style="width: 970px" class="wp-caption aligncenter"><img class="wp-image-51810 size-full"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7.png" alt="장가항 프로젝트가 취소 위기에 놓인 가운데 포스코건설이 발주한 설비들이 장가항의 임시 야적장을 가득 메운 모습 " width="960" height="369" srcset="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7.png 960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7-800x308.png 800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7-768x295.png 768w" sizes="(max-width: 960px) 100vw, 960px" /><p class="wp-caption-text">▲1997년 말까지 도착하는 설비는 중국 정부로부터 면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설비 발주를 서둘렀고, 때마침 IMF 금융위기가 터졌다. 장가항 프로젝트가 취소 위기에 놓인 가운데 포스코건설이 발주한 설비들이 장가항의 임시 야적장을 가득 메웠다. 프로젝트가 취소될 경우 지불해야 하는 페널티만 1억 2000만 달러에 달했다.</p></div>
<p>“포스코가 어떻고 포스코건설이 어떻고 하는 것은 포스코 내부에서나 있을 수 있는 말이지, 중국의 사강집단이나 설비 메이커가 보기에는 어차피 하나의 묶음이에요. 1996년 7월 15일 열린 이사회 결의사항에 의하면 장가항 프로젝트의 총 투자액은 2억 1600만 달러였는데, 이후 좀 더 세밀하게 따져본 실질적 투자액은 1억 6000만 달러로 계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업을 캔슬하거나 지연시키면 가만히 앉아서 1억 2000만 달러를 물어야 하는 거였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서 본사에 보고하고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든 추진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더니, 본부장을 맡고 계시던 이춘호 부사장께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p>
<p>-무슨 이런 협박장을 보냈냐?</p>
<p>사업을 접을 경우 물어야 할 엄청난 금액의 페널티를 계산해 보이며 계속적인 추진을 건의했으니 협박장이라고 해서 틀릴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돈 꾸는 것은 오롯이 그의 일이 되고 말았다. 냉정하게 등을 돌린 HSBC 지점장을 만나 최종 담판을 하듯 들이밀었다.</p>
<p>-명색이 포스코에서 돈을 좀 빌려달라는데 이럴 수 있습니까?</p>
<p>-포스코가 어느 나라 회사입니까? 한국 회사 아닙니까? 한국이 파산했는데, 무슨 포스코 이야기를 합니까?</p>
<p><strong>나라가 잘되고 봐야 한다는 생각 지금껏 가슴에 사무쳐 </strong><br />
<strong>양자강에 빠져 죽겠다는 절실함으로 차입계약 성사시켜 </strong></p>
<p>“그날 이후 이날까지 나는 ‘나라가 잘되고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가슴에 새겨두고 있어요. 이후 중국에 있는 한국계 은행은 모두 무너졌고, 외국계 은행은 모두 꽁무니를 빼는 상황에서 본사에서는 돈이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매일 성화였습니다. 그때 나는 돈에 미친 사람이 되어 있었고, 돈을 꾸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1998년 5월부터는 비밀리에 중국계 은행과 접촉했더니 그들 또한 비밀리에 포스코의 모든 사항을 조사, 분석하기 시작했다는 걸 감지했습니다.”</p>
<p>천신만고 끝에 1998년 8월 28일 BOA(Bank of America)와 2000만 달러의 차입계약을 체결했다. 연리 13.5%였다. 당시의 시중 금리로서는 2% 정도면 될 일이었지만, 한국이 처한 상황을 볼 때 13.5%도 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물꼬가 트이면서 그해 12월 2일 중국은행으로부터의 차입 2500만 달러를 비롯해 모두 8000만 달러를 확보, 공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p>
<p>“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끼칩니다. 현지 사정은 무시하고 다그치기만 하는 본사가 야속하기 그지없었어요. 그런데 그때 내가 회사에 와서 배운 것이 있지 않으냐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바로 ‘우향우 정신’이었지요. 실패하면 영일만이 아닌 양자강에 빠져 죽자는 그 정신은 선배들이 물려준 것이었지요. 나는 천성이 모질거나 독하지 못합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란 말은 내 성격에 맞지도 않고 경영학의 그 어디에도 없는 말이지요. 그러나 다른 모든 방법이 차단된 상황에서는 그런 정신이 힘을 발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p>
<p>1999년 1월 22일, 연산 12만 5000톤 규모의 1기 공장 준공 후 그의 관심사는 온통 조업도 달성이었다. 그런데 1998년까지만 해도 톤당 4000달러였던 니켈 가격이 슬금슬금 뛰기 시작하더니 5000달러를 넘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스테인리스 강재는 니켈 가격과 연동되는데, 니켈 가격이 오르면서 스테인리스 수요 또한 계속 늘었다. 생산부장과 공장장들을 불러 확인했더니 앞으로 5년간 스테인리스 생산량을 월 2000톤으로 계획하고 있었다.</p>
<p>“왜 그런 계획을 세웠느냐고 물었더니 중국 젊은이들의 현실적인 능력을 고려했다는 겁니다. 능력이 모자라면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지 생산량을 줄이면 되겠느냐면서 준공 후 무려 5년 동안이나 손익분기점에서 간신히 턱걸이하는 회사에 어느 은행이 돈을 꾸어주겠느냐며 호통을 쳤더니 뭔가 분위기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더군요.”</p>
<p>그는 누가 이런 계획을 세웠는지는 묻지 않겠지만, 앞으로 이 숫자에 집착하는 정도에 따라 양자강에 빠질 순서를 정하겠다면서 분위기를 다잡았다. 2월 생산량을 2000톤으로 하고 이후 매월 1000톤씩 늘려 7월에는 7000톤을 달성하고, 8월에는 무조건 1만 톤을 생산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결국 장가항포항불수강은 1999년 조업 첫해에 53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p>
<div id="attachment_51806" style="width: 970px" class="wp-caption aligncenter"><img class="wp-image-51806 size-full"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3.png" alt="중국의 이붕(李鵬) 전 총리(가운데) 일행이 장가항포항불수강을 방문해 제품 생산현장을 둘러보고 품질 수준 및 시장 판매 현황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width="960" height="978" srcset="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3.png 960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3-785x800.png 785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3-768x782.png 768w" sizes="(max-width: 960px) 100vw, 960px" /><p class="wp-caption-text">▲2002년 2월 4일 중국의 이붕(李鵬) 전 총리(가운데) 일행이 장가항포항불수강을 방문해 제품 생산현장을 둘러보고 품질 수준 및 시장 판매 현황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장가항 프로젝트는 이붕 전 총리가 재직 시 서명 비준한 중국 최대의 STS냉연 프로젝트다.</p></div>
<p><strong>조업ㆍ설비 확장 병행하며 2기, 3기 공사 잇달아 준공 </strong><br />
<strong>2011년 100만 톤 규모 STS 일관생산체제 확립 </strong></p>
<p>2002년 3월 확장공사에 돌입, 2003년 9월 19일 연산 40만 톤 규모의 스테인리스 냉연 2기 설비를 준공했다. 그러나 냉연 소재인 스테인리스 열연코일은 포스코로부터 공급받아야 했다. 2004년 2월 그는 포스코센터 29층 회장 집무실에서 이구택 회장과 마주했다. 이구택 회장이 입을 뗐다.</p>
<p>-어떻게 할 생각인가? 계속 포스코에서 열연코일을 가져다가 조업을 한 건가?</p>
<p>-저도 상공정을 갖고 싶습니다. 제강공장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p>
<p>-스테인리스 일관제철소를 만들자. 어떻게든 추진해야 한다.</p>
<p>이후 수없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중국 정부로부터 관련 면허를 획득해 2004년 12월 22일 3기 공사를 착공, 2년 가까운 공기를 거쳐 2006년 11월 22일 준공했다. 3기 공사를 통해 장가항포항불수강은 스테인리스 열연코일 60만 톤을 생산할 수 있는 제강과 열연공장을 완성, 해외 첫 스테인리스 일관생산체제를 구축했다.</p>
<p>“당시 생산능력은 연간 110만 톤이었지만 중국 정부에는 60만 톤으로 낮추어 보고했습니다. 지금은 연 매출 29억 달러 정도에 전량 중국 내수로 쓰이기 때문에 마케팅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명예회장님께서도 장가항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5번이나 현장을 찾아오셔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기억이 새롭습니다.”</p>
<div id="attachment_51809" style="width: 970px" class="wp-caption aligncenter"><img class="wp-image-51809 size-full"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6.png" alt="박태준 명예회장은 5번이나 장가항포항불수강을 찾아 해외 첫 STS 일관밀 건설이라는 대역사의 현장에서 조업과 건설에 매진하고 있는 임직원을 격려했다" width="960" height="638" srcset="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6.png 960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6-800x532.png 800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6-768x510.png 768w" sizes="(max-width: 960px) 100vw, 960px" /><p class="wp-caption-text">▲박태준 명예회장은 5번이나 장가항포항불수강을 찾아 해외 첫 STS 일관밀 건설이라는 대역사의 현장에서 조업과 건설에 매진하고 있는 임직원을 격려했다.</p></div>
<p>초창기 1기 설비 준공후 조업과 확장공사를 병행할 때에는 포스코에서 지원군이 300~400명 나와 있었다. 그는 엔지니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철저한 사명감을 강조하는 한편, 기술적인 문제는 기술자들이 알아서 하도록 믿고 맡기는 식으로 회사를 꾸려나갔다. 이후 2008년 2월 스테인리스 담당 부사장으로 귀국했다. 그해 장가항은 16억 달러의 연매출을 올렸다.</p>
<div id="attachment_51808" style="width: 970px" class="wp-caption aligncenter"><img class="wp-image-51808 size-full"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5.png" alt="일관생산 100만 톤 체제를 완성한 장가항포항불수강 전경" width="960" height="539" srcset="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5.png 960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5-640x360.png 640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5-800x449.png 800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5-768x431.png 768w" sizes="(max-width: 960px) 100vw, 960px" /><p class="wp-caption-text">▲장가항포항불수강은 2011년 6월 연간 조강 100만 톤, 냉연 60만 톤 생산체제를 갖췄다. 100만 톤 생산체제 구축은 중국 내 외국기업 가운데 최초다. 사진은 일관생산 100만 톤 체제를 완성한 장가항포항불수강 전경.</p></div>
<p>“내가 떠난 뒤 2011년 장가항은 3기 증설사업을 통해 연산 100만 톤 체제를 갖추었어요. 중국에서 태원 다음가는 스테인리스 생산 회사로 성장했죠. 올해도 장가항에 갔다 왔는데, 공장뿐 아니라 주변 환경에 많은 변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비서실 차장으로 2년 남짓 근무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CEO가 외로운 결단을 내리는 것을 더러 보았기 때문이죠. 당시 비서실은 그야말로 격동의 나날들이었습니다. 책으로 펴내면 논픽션 5권을 될 것입니다만, 그런 이야기는 묻어두는 것이 좋겠죠.”</p>
<p><img class="aligncenter wp-image-51805 size-full"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2.png" alt="정길수 전 부사장 주요 경력 1949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72년 한국외국어대 서반아어과 졸업 1975년 포스코 입사 멕시코사무소장, 정보기획과장, 대외협력부 과·차장, 비서실 차장, 상하이사무소장, SEAISI 사무총장, 장가항포항불수강 총경리 2008년 스테인리스부문장 2009년 한국철강협회 STS클럽회장 2010년 포스코차이나 회장보좌역 " width="960" height="481" srcset="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2.png 960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2-800x401.png 800w, https://dev-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8/98_02-768x385.png 768w" sizes="(max-width: 960px) 100vw, 960px" /></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5/nam.png" alt="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width="450" height="137" usemap="#imgmap201852142921" /></p>
<map id="imgmap201852142921" name="imgmap201852142921">
<area alt="56편 이후 모아보기" coords="1,84,220,134" shape="rect" href="https://newsroom.posco.com/kr/tag/%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 target="_blank" />
<area alt="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coords="228,83,446,135" shape="rect" href="http://www.posco.co.kr/homepage/docs/kor6/jsp/news/posco/s91fnews002l.jsp?saveText=%B3%B2%B1%E2%B0%ED%BD%CD%C0%BA%C0%CC%BE%DF%B1%E2" target="_blank" /> </map>
]]></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남기고싶은이야기97] 김광일 前 건설공정실장 “안 되는 것은 없다… 윗사람의 의중 헤아려 미션 완수”</title>
				<link>https://dev-newsroom.posco.com/kr/%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97-%ea%b9%80%ea%b4%91%ec%9d%bc-%e5%89%8d-%ea%b1%b4%ec%84%a4%ea%b3%b5%ec%a0%95%ec%8b%a4%ec%9e%a5-%ec%95%88-%eb%90%98/</link>
				<pubDate>Thu, 21 Jun 2018 09:00:44 +0000</pubDate>
				<dc:creator><![CDATA[parky]]></dc:creator>
						<category><![CDATA[사람과문화]]></category>
		<category><![CDATA[남기고싶은이야기]]></category>
									<description><![CDATA[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align="justify"><img class="alignnone" title="title.jpg" src="http://www.poscoway.net:8101/UPFILE/S15010/board/editor/2018/6/20/201806201144361226f974-307a-4e3c-b8a7-dc6226ba0dd1.jpg" alt="&quot;안 되는 것은 없다... 윗사람의 의중 헤아려 미션 완수&quot; 김광일 前 건설공정실장 " width="960" height="727" /></p>
<p align="justify">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p>
<p align="justify"><strong>ㅣ제철소 표고계획 +3m로 관철시켜 건설비 대폭 절감</strong><br />
<strong>ㅣ내란 중인 이란에 출장… 4억 5000만 달러 계약 물꼬 터</strong><br />
<strong>ㅣ설비공급사 성능 보장 조항 아무도 생각 못 한 묘안 실행에 옮겨</strong></p>
<p align="justify">포항제철소 3기 설비 확장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77년 여름, 김광일 건설본부 조사역은 중동 지역 순방에 나섰다. 중동 지역 후판 수요개발 조사와 포항제철의 현지 사무소 개설 임무를 띤 출장이었다.</p>
<p align="justify">“박태준 사장이 판매 쪽에 내린 지시였어요. 당시 중동 지역에 개발 붐이 일면서 이른바 중동 특수가 일고 있었고, 중동 특수의 가장 큰 부분이 토목사업이었기 때문에 토목기술자가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판매부 박인수 과장과 함께 출장 갔어요. 약 한 달 동안 중동 지역을 광범위하게 조사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제다•리야드•주베일 산업항 등),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 10여 개 국를 거쳐 마지막으로 이란 테헤란에 갔더니 현시학(玄時學) 이란 주재 한국대사가 아는 분이어서 도움을 받았어요. 현 대사는 내가 해군 장교로 근무할 때 해군 참모차장을 지낸 분이었습니다.”</p>
<p align="justify">해외 연락사무소 위치는 쿠웨이트와 이란을 비교, 검토한 후 이란의 테헤란으로 건의하여 그렇게 결정되었는데, 뜻밖에도 당시 김광일 조사역이 초대 테헤란사무소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테헤란사무소장 재임 기간은 1년 반 만에 끝나고 말았다.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팔레비(Pahlevi) 왕조 붕괴로 정정이 극도로 불안했기 때문에 1979년 1월 11일 쫓기듯 이스탄불행 팬암 항공편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p>
<p>“사무소 정리도, 폐쇄 조치도 못하고 서둘러 몸만 빠져나왔어요. 1979년 2월 박태준 사장께 귀국 인사를 하면서 가정 형편상 건설회사로 이직해야겠다고 말씀드렸지요. 포항제철은 이미 550만 톤 체제의 3기 설비를 효율적으로 가동할 정도로 안정기에 접어들어 있었어요. 이후 4기 설비 건설도 계획되어 있고, 제2제철 건설 논의도 있었지만, 영일만 허허벌판에다 공장을 짓던 초창기에 비하면 토목 관련 업무 비중이 많이 줄어들어 있기도 해서 드린 말씀이었지요. 나는 그때 이미 현대건설과 이야기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p>
<p align="justify">그러나 박태준 사장의 반응은 한마디로 ‘안 돼’였다. 하필이면 그때 제2제철 실수요자 문제로 포철과 현대의 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박태준 사장은 당신이 추천하는 회사로 가라면서 그 자리에서 신화건설 이남주(李南柱)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곧 중역이 될 사람이니 전무 자리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다.</p>
<p align="justify">“사장실에서 내려오니 정명식 본부장께서 신화건설로부터 받은 전화 내용을 일러주더군. 얼마 전에 토목 담당 전무를 이미 채용했으니 포철 담당 상무로 채용하겠다는 것이었어요. 상무든 전무든 사장께서 그리로 가라니 갈 수밖에 없었지.”</p>
<p align="justify"><strong>軍, 호남정유에서 8년간 토목 프로젝트 경력 인정받아 과장으로 입사</strong><br />
<strong> 日 가와사키제철 우에노(上野) 고문의 제안으로 ‘굴입항만’으로 최종 확정</strong></p>
<p align="justify">그는 1968년 7월 1일 토목 담당(2급 1호봉) 과장으로 입사한 몇 안 되는 경력의 소유자였다. 당시 상당한 경력자라 하더라도 3급 사원으로 입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p>
<p align="justify">“저는 1960년 3월 서울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4월 해군사관학교 간부후보생 훈련을 거쳐 해군 시설장교로 임관한 뒤 항만, 건선거(dry dockㆍ선박의 수리를 위해 만든 구조물) 설계ㆍ감독 등 토목 분야 경력을 모두 군에서 쌓았어요. 냉전의 절정기에 해당하는 1962년 8월 짧은 동안이나마 캘리포니아 포트 와이니미(Port Hueneme)에 있는 미 해군시설 장교학교(Naval Civil Engineer Corps Officers School) OJT 과정에 선발되어 선진 기술을 익혔었죠.”</p>
<p align="justify">귀국 후 그는 해군 본부 시설감실 항만 담당으로 근무하면서 미 해군 시설 고문단장 상담역을 겸임했다. 포항 해병기지사령부에 파견 근무를 하면서 약 2년간 LST(전차상륙함) 접안 부두 설계를 위한 수중측량, 지반조사를 비롯해 설계도면 작성, 공사계약 후에는 공사감독관 업무를 수행하며 포항 지역의 해양, 항만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췄다.</p>
<p align="justify">1967년 1월 31일부로 대위 예편 후 건설부 한강유역개발조사단 항로과 계장으로 발령받아 1967년 2월 1일부터 근무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건설부에 잘 아는 대학 선배가 (주)호남정유 여수정유공장프로젝트(Yeosu Honam Refinery Project)본부에서 영어가 능통하고 항만 분야 경험이 있는 토목기술자를 찾고 있는데 뜻이 있으면 추천해주겠다고 했다. 월급은 현장 수당 포함 7만 원 정도가 된다고 하여 건설부에 사표를 내고 여수정유공장프로젝트에 참여해 미국 칼텍스(Caltex)사의 매니저들과 함께 공장 부지 조성부터 유조선 접안시설(imodoco buoy), 공장 설비 기초공사 등 1년 6개월간 공정별로 공사를 수행하는 노하우를 터득했다.</p>
<p align="justify">“토목기사로서의 현장 업무를 끝내고 미국 내 칼텍스 정유공장에서 6개월간 공장장 훈련과정을 준비하던 중 포항제철에서 토목과장 요원을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가 눈에 띄는 거야. 모집요강에는 실무경력 7년 이상, 출신 대학교수의 추천서가 필요했고, 채용 절차는 서류심사와 구두시험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면접시험은 총 3개 분야로 나누어 치러졌는데, 첫 번째 파트는 당시 이종열 총무이사 주재로 배환식 총무부장, 안병화 SM부장, 황경노 관리실장이 영어 구사능력, 입사 동기 등 일반적인 사항을 물었어요. 두 번째 파트에서는 이홍종 건설이사와 김상억 실장이 부지조성, 원료ㆍ제품 부두의 적정 표고(標高) 등 당면 문제에 대해 질문했고, 세 번째 파트는 서울대 토목과 박상조 주임교수의 전문지식에 대한 질문이 진행됐어요. 박상조 교수는 입사 추천서를 자필로 써주신 분으로, 월급쟁이는 뭐니 뭐니 해도 월급이 많은 호남정유에서 근무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가 있었지만 유사 이래 가장 큰 일관제철소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 토목기술자로서 보람이 있을 것 같아 포항제철 입사를 결심하게 됐죠.”</p>
<p align="justify">면접이 끝나고 당시 현영환 총무차장은 미안하지만 나이가 30세가 안되니 3급 최고 호봉인 14호봉을 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월급이 반토막(3만 5000원)이 나고 포철 입사를 결심했던 취지에도 맞지 않으므로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2급 1호봉 토목 담당으로 7월 1일부로 발령을 내줬고, 근무는 6월 15일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p>
<p align="justify">본사 건설본부장실 토목 담당의 업무 중 하나는 일본 가와사키(川崎)제철의 우에노 조사부로(上野長三郞) 고문의 카운터파트 역이었다. 우에노 고문은 1968년 4월 1일부로 박태준 사장의 기술고문으로 위촉되어 5년간 포항제철소의 항만계획과 공장배치안에 대한 기본 구상과 KISA의 컨설턴트인 미국 코퍼스(Koppers)사가 제시한 기본계획에 대한 검토 조언 등 제철소 전반에 걸친 자문을 했다.</p>
<p align="justify">우에노 고문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대만 가오슝(高雄) 항의 해군시설 부장(해군 대령)으로 군항 확장 계획을 수립했고, 귀국 후에는 가와사키제철에 부임해 제철소 계획 설계, 공사 등 폭넓은 분야에 걸쳐 각별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지바(千葉)ㆍ미즈시마(水島)제철소 건설에 기여했다. 해군 시설 장교로 근무한 공통점이 있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초기 단계에 포항 입지에 적합한 굴입항만 안(案)을 스케치해가며 알기 쉽게 설명해주어 준설과 부지 성토의 병행 시공에 따른 공사비 절감과 제한된 공기 내에 항만을 건설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U자형 굴입식 안벽을 공장 중앙에 배치하여 최종 규모로의 확장이 쉽도록 했다.</p>
<p align="justify">“당시 항만 건설은 정부 지원 사업으로서 일본 퍼시픽 컨설턴트(PCKKㆍPacific Consultants K.K)의 용역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1968년 3월 건설부와 일본 PCKK, 우에노 고문이 참석한 가운데 굴입식 항만으로 할 것을 최종 확정하여 같은 해 4월 KISA가 작성한 직선 안벽식의 초기 용량 연산 60만 톤(최종 300만 톤)으로 계획된 안을 추후에도 확장이 가능토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p>
<p align="justify">당시 코퍼스사가 제시한 직선 안벽식 부지조성 표고계획 합의사항을 상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p>
<p align="justify">제철소의 후판ㆍ열연ㆍ냉연공장의 기초가 지하 20m 이하로 내려가기 때문에 공장 배수를 고려하여 형산강~구룡포 간 국토변의 지반 높이를 형산강 제방 높이 +7.5m에서 2.0m 낮춘 +5.5m로 하고, 직선 안벽의 표고는 +4.5m로 하여 1.0m의 완만한 기울기를 두도록 했다. 또 부지 성토를 할 때는 25cm마다 지반 다짐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p>
<p align="justify">당시 김광일 토목과장은 이러한 사양으로 부지조성을 하게 되면 제철소를 언제 지을 것인가에 대해 코퍼스사 어시스턴트 프로젝트 매니저인 모어랜드(Moreland) 씨, 현지 주재 이사 홀스(Holes) 씨와 불합리한 항목을 조목조목 따져 합의를 이끌어 냈다.</p>
<p align="justify">KISA가 제시한 직선 안벽 표고 +4.5m에 대하여는 영일만 조수간만의 차가 18cm밖에 안되고 포항 시내 모든 안벽의 높이가 +2.0m이므로 1m 여유를 두어 +3.0m로 하고, 국토변의 성토고 역시 +5.5m에서 +4.5m로 낮출 수 있다고 설득했다. 뿐만 아니라 부지 성토를 할 때 25cm 간격으로 지반 다짐하는 조항도 삭제했다. 지반 다짐을 생략함에 따른 건설공기 단축 및 투자비 절감 효과는 막대했다.</p>
<p align="justify">그가 이 같은 핵심사항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해군과 호남정유에서 다년간 축적한 항만, 해양 분야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 덕분이었다. 그는 포항 해병기지사령부 파견 당시 LST 접안 부두 설계 및 공사 감독을 하며 포항지역 항만과 해양에 대해 익혔고, 호남정유 공장 건설 당시에는 미국 칼텍스사 프로젝트 매니저들과 약 2년간 부지 조성부터 유조선 계류시설 및 제반 인프라 건설까지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p>
<p align="justify">KISA측의 보고서는 U자형 굴입항만 시설을 준설하고 그 준설토로 매립하는 내용을 모르고 작성된 것임으로 그는 그해 12월 초 KISA측 모얼랜드 씨와 홀스 씨를 포항 준설 현장으로 안내했다. 당시 펌프 준설선에서 쏟아내는 모래, 자갈 등의 토사는 양질의 성토재로 손색이 없었다. 25cm 간격으로 다짐작업을 할 수도 없거니와 준설선에서 퍼올린 모래를 부지에 쏟아놓으면 자연스럽게 물다짐이 이루어졌다. 이를 본 모얼랜드 씨와 홀스 씨는 ‘원더풀(wonderful)’을 연발했다.</p>
<p align="justify">모얼랜드 씨와 홀스 씨는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투숙 중이던 남산 근처 타워호텔에 김광일 과장 부부와 여상환 외국계약부 주무계장 부부를 초대해 깊은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후 코퍼스사와 포항제철 간 기술 협의는 원만히 진행될 수 있었다.</p>
<p align="justify">KISA가 해산되고 일본의 자금과 기술을 도입하기로 결정되자 포철은 일본의 야하다제철, 후지제철, 일본강관 3개사로 구성된 JG(Japan Group)와 1968년 12월 예비 기술용역 계약을 체결하여 연산 103만 톤 규모의 제철소 건설의 기본이 되는 사항을 망라한 Preminary Engineering Report를 작성했다. 그중 공장 배치계획 작성에 있어 우에노 고문의 안을 기초로 한 기본구상안을 JG에 제출, 반영(1969년 12월 2일)함으로써 현재의 포항제철소 레이아웃이 탄생되었다. 포항제철소 최종 규모를 연산 500만 톤에서 현재 910만 톤으로 변경, 확정시킨 것은 우에노 고문의 원대한 통찰력과 국경을 초월한 진실된 조언, 세심한 배려에 의한 결과라고 생각한다.</p>
<p align="justify">또 하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우에노 고문의 공적이 있다면 제철소 건설의 경험이 전무한 우리를 위해 건설요원의 OJT 교육이 반드시 필요함을 박태준 사장에게 강력히 역설한 것이다. 덕분에 1968년 10월 23일부터 11월 15일까지 1차로 박종태 부장을 단장으로 하여 건축에 심인보 차장, 행정에 신현욱 차장, 토목에 김광일 과장, 기전에 이광일 계장 등 5명이 1조가 되어 지바제철소를 경유, 미즈시마제철소에서 3주간에 걸쳐 연수를 받았다. 숙소는 우에노 고문이 미즈시마제철소에 내려오면 투숙하는 구라시키(倉敷) 시내에 있는 후쿠지소(福地莊)라는 전통여관이었다.</p>
<p align="justify">우에노 고문은 몸소 미즈시마제철소에 내려와 옛 간부들을 전원 소집, 연수 계획을 작성토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우리 일행을 격려했다. 또 제철소 간부들에게는 앞으로 포항제철소의 건설을 담당할 연수생에게 무엇이든지 다 가르쳐주도록 지시했고, 필요한 자료와 참고 설계도면도 제공하도록 해줬다. 이때 수집한 자료와 참고 도면은 귀국 후 제철소 설계 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 가지 예로 포항제철소 정문은 미즈시마제철소 정문 설계도면을 참조하여 똑같이 설계한 것이다.</p>
<p align="justify">연수가 끝나갈 무렵 일요일에 근처 히메지성(姫路城)을 관광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우에노 고문에게 부탁해서 관광을 포기하고 일요일 밤 기차로 도쿄로 갔다. 우에노 고문은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 도쿄역에서 그의 직속 부하인 후루카와 신지(古川新次) 전 지바제철소 토목과장의 안내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주어 그날 하루 종일 일본 토목학회, 토질공학회(현재 지반공학회), 항만협회, 국제항만협회 회원 가입을 하고, 협회 전문서적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때 만난 우에노 고문의 교토(京都)대학 후배 교수들을 비롯하여 가와사키제철 출신들과는 지금까지도 각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p>
<p align="justify">우에노 고문의 남다른 업적의 한 예다. 1972년 4월까지 230만 평의 부지 조성을 완료하려면 굴입항만에서 준설선으로 퍼올린 토사로 성토, 매립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준설선의 펌프 능력은 울산만호 5000마력(HP)이 최대이고, 준설토사의 파이프 이송거리는 최대 2km로 준설지점에서 공장부지 예정 거리 2.5~3.0km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우에노 고문의 조언으로 부족한 거리만큼 굴입항만에서 굴입하여 토사의 거리를 단축, 한국이 보유한 준설선으로 작업이 가능할 뿐 아니라 더 많은 준설토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굴입으로 조성된 해면은 파도와 관계없이 하역이 가능해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게 되었다. 이처럼 우에노 고문의 공적은 막대했다.</p>
<p align="justify">포항 2기 설비 건설 당시 중앙정보부와 맞먹는 초대 치안본부장에 박태준 사장의 육사 동기생이 임명되어 축하를 겸해서 한강변 조용한 곳에서 만났다. 이때 치안본부장이 고로 건설에 많이 쓰이는 계장 설비를 처남이 근무하고 있는 이성설비가 포항제철과 직접 계약해 납품할 수 있도록 부탁해 왔다.</p>
<p align="justify">“고로설비는 현대건설이 주계약자였고, 성능 보장이 안되는 하청업체인 이성설비와는 직접 계약이 불가능하다는 계약부서 및 건설책임부서의 의견이 나와 박태준 사장이 난감한 상황이었어요. 건설공정실은 산하에 공사 행정 관련 부서를 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각 공장의 설비 공급과 외국 공급사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는 업무를 맡고 있어 당시 고로설비 공급사의 현장 책임자인 IHI사의 이시가와(石川) 소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어요. 이성설비가 한국에서 최상의 계장설비 공급업체임을 설명했고, IHI사의 전문기술자를 한국에 파견, 이성설비를 조사하게 하고 성능 보장이 가능하다는 서류를 작성해 계약부서에 통보함으로써 계약이 성사되었어요. 내가 매월 주관하는 건설회의에도 이성설비 사장이 참석하게 되었죠. 최고 경영자는 기술자나 행정요원과 달리 경영의 여러 부분을 두루 살펴야 합니다. 이럴 때 아랫사람은 무조건 안된다고만 하지 말고 윗사람의 입장을 헤아려야 해요.”</p>
<p align="justify"><strong>박태준 사장 지시로 1980년 말 이란에 급파되어 국제정세 파악 임무 수행</strong><br />
<strong>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 ‘토목기술자’로서 가장 큰 보람 느껴</strong></p>
<p align="justify">이야기는 다시 신화건설 상무이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포항제철에서 신화건설로 옮겨 포항제철로부터 수주한 현장을 독려하느라 바삐 지내고 있었는데, 박준민 경영정책실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1980년 12월경이었다.</p>
<p align="justify">“다시 포철로 들어와서 이란으로 출장을 가라는 거야.”</p>
<p>사건은 박태준 당시 국회 재정위원장에게 올라간 국제문제조사연구소의 특별연구보고 제4호라는 문건에서 발단이 되었다. ‘이란•이라크 간 휴전 성립 시 전후 복구에 우선 참여를 위한 시안(試案)’이라는 문건을 접한 박태준 사장이 그 문건에 메모를 해서 경영정책실로 내려보낸 것이었다. 박태준 사장 특유의 구불구불한 반초서체 글씨의 메모와 이른바 달팽이 사인은 이렇게 지시하고 있었다.</p>
<p align="justify">&#8211; 경영정책실장 면밀히 검토 후 대책 요. 우선 신화건설에 나가있는 김광일 군을 그 지역에 사전 파견하여 정세를 파악하는 것이 좋을 듯 생각됨 &#8211;</p>
<p>&#8220;박준민 실장이 사장 지시사항이니 가능한 한 빨리 결정해 주어야 되겠다는 전화를 자꾸 걸어오는 거예요.&#8221;</p>
<p>신화건설에 상무로 근무하게 된 것도 박 사장의 배려 덕분임을 생각할 때 거절할 수가 없어 신화의 이남주 사장께 말씀드리고 12월 31일 포항으로 내려갔다. 정월 초하루 효자단지의 A동(사장 숙소)으로 찾아가 이란 출장 결심사항을 보고 차 찾아뵈려고 했으나 연말 과로와 몸살이 난 사장님을 못 뵙고 대신 사모님께 말씀드렸더니, 1월 5일 서울 본사에서 뵙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곧바로 귀경했다. 1월 5일 사장실에는 새해인사차 주요 내빈과 전직 간부가 많아 5인 1조가 되어 이상수, 장경환, 한명환 전직 임원과 같이 인사를 드렸다. 박 사장이 그에게 좀 기다리게 하고 조말수 비서실장을 불러 오늘 당장 김광일 여권을 신청해서 주 이란 미국대사관 인질극이 풀리기 전에 테헤란에 도착시킬 것을 지시했다. 박 사장의 지시사항은 “전쟁으로 파괴된 복구 공사에 소요될 철강자재 수요조사와 테헤란사무소 재개 필요성을 약 3개월간 검토하고 돌아오게. 수고하게”가 전부였다.</p>
<p align="justify">인질극이란 이란의 미국대사관 점거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1979년 추방된 팔레비 국왕은 미국으로 망명했고, 호메이니(Khomeini)는 미국에 그의 소환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격화된 나머지 호메이니 혁명정부는 테헤란의 미국대사관을 점거했고, 대사관 직원들은 인질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p>
<p align="justify">“판매이사 보좌역에다 이란 강재 수요개발 조사단장이란 직함으로 3개월의 출장명령이 났는데, 출장비가 무려 3만 달러였어요. 지금 돈으로 치면 1억 원쯤 될 겁니다. 여비규정으로는 그런 출장비가 나올 수 없었으니 특별활동비나 다른 어떤 명목으로 그렇게 나왔을 것으로 생각했지. 당시 이란으로 들어가는 항공편은 이란항공으로 런던에서 한 편, 파리에서 한 편, 이렇게 일주일에 두 편밖에 없었어요. 런던을 통해 이란으로 들어가 먼저 한국대사관과 접촉했습니다. 안기부에서 나온 참사관도 만났는데 반갑게 대해주었어요. 다들 서둘러 이란을 빠져나가는 판인데, 거꾸로 들어왔으니 뭔가 임무를 띠고 있을 거라고 본 것 같았어요.”</p>
<p align="justify">한국대사관의 협조를 얻어 이란인 운전수와 지프 한대를 임대하여 ‘전쟁지역 통과 중’을 지프 전면에 붙이고 현장조사를 하는 가운데 본사에는 일주일, 늦어도 열흘 간격으로 상황보고를 해야 했다. 주로 코트라(KOTRA)의 텔렉스를 이용하여 본사의 장중웅 경영정책실 종합기획과장 앞으로 보냈다.</p>
<p align="justify">그런데 거의 끝나갈 무렵 안기부에서 나와 있던 이근호 참사관으로부터 그야말로 특급 정보를 건네받았어요. 4억 5000만 달러 상당의 비행기 및 군장비 부품 상담이었어요. 평상시 같으면 미국과 접촉할 일이었지만 당시 미국대사관은 기능이 중단된 상황이었고, 이 참사관은 정부 공식 라인을 건너뛰어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 있는 채널을 찾고 있었던 거야. 이근호 참사관에게 주요 인사를 포항 4기 종합준공식(1981.2.18)에 초청하여 입국시키고 준공식 참석 후 안기부 직원 입회하에 국제상사와 실무 접촉케 하는 비밀 서신을 한국으로 가는 인편을 수소문해서 박태준 사장에게 올렸다.</p>
<p align="justify">박태준 사장은 미8군사령관의 허가를 득해야 할 사항임을 감안, 전두환 대통령과 처음으로 독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전 대통령께서 박 사장의 제철보국 이외에 국가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하여 후일 양가가 사돈의 인연을 맺게 되는 터닝포인트가 되었다.</p>
<p align="justify">그는 예정된 출장 기간을 마치고 5월 초 귀국한 뒤 그해 10월 박태준 사장께 ㈜한양 평택LNG기지 건설 담당 임원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보고드렸다. 박 사장은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따뜻하게 격려해주었다.</p>
<p>&#8220;일본 격언에 엔노시타노 치카라모치(緑の下の力持ち), 즉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토목기술자의 숙명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프로젝트 초기에 이러한 일들을 묵묵히 해내는 것입니다. 초대 토목과장으로서 대한민국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에 한없는 보람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포스코가 세계에서 으뜸가는 기업으로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p>
<p align="right"> 우재욱 &lt;시인∙작가&gt;</p>
<div style="width: 970px" class="wp-caption alignnone"><img title="01.jpg" src="http://www.poscoway.net:8101/UPFILE/S15010/board/editor/2018/6/20/2018062011443635b80d77-8f4d-425d-8a36-3ed1679e316e.jpg" alt="1971년 5월 17일 김광일 당시 제선토건과장이 박종태 포항제철소장, 박태준 사장, 조용선 제선설비반장과 함께 포항 1기 제선설비 공사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width="960" height="727" /><p class="wp-caption-text">▲1971년 5월 17일 김광일 당시 제선토건과장이 박종태 포항제철소장, 박태준 사장, 조용선 제선설비반장(왼쪽부터)과 함께 포항 1기 제선설비 공사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포항제철은 1973년 7월 연산 103만 톤 규모의 1기 설비를 준공했으며, 그 해 12월 1일 조강 연산 157만 톤 규모의 2기 공사를 착공했다.</p></div>
<div style="width: 970px" class="wp-caption alignnone"><img title="02.jpg" src="http://www.poscoway.net:8101/UPFILE/S15010/board/editor/2018/6/20/2018062011443686337970-4bc6-4a62-a2fc-970777cd753a.jpg" alt="1976년 12월 송년모임에서 김광일 전 건설공정실장이 포항 3기 설비 공사의 성공적 완수를 기원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width="960" height="727" /><p class="wp-caption-text">▲1976년 12월 송년모임에서 김광일 전 건설공정실장 (사진 왼쪽)이 포항 3기 설비 공사의 성공적 완수를 기원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이영직 설계부 차장, 이성림 기전부장, 심인보 토건부장, 김두하 설계부장, 육완식 부본부장, 정명식 본부장.</p></div>
<div style="width: 970px" class="wp-caption alignnone"><img title="03.jpg" src="http://www.poscoway.net:8101/UPFILE/S15010/board/editor/2018/6/20/20180620114436a4ae37e7-542b-4dc4-a7aa-c9ed7bd72804.jpg" alt="김광일 전 건설공정실장이 1968년 7월 1일 토목과장으로 입사하면서 받은 사령장" width="960" height="727" /><p class="wp-caption-text">▲김광일 전 건설공정실장이 1968년 7월 1일 토목과장으로 입사하면서 받은 사령장. 당시 상당한 경력자라 하더라도 3급 사원으로 입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p></div>
<div style="width: 970px" class="wp-caption alignnone"><img title="04.jpg" src="http://www.poscoway.net:8101/UPFILE/S15010/board/editor/2018/6/20/201806201144368b09c663-7864-4281-a153-02def55f5059.jpg" alt="1980년 11월 박태준 당시 국회 재무위원장에게 올라간 국제문제조사연구소 특별연구보고 제4호" width="960" height="727" /><p class="wp-caption-text">▲1980년 11월 박태준 당시 국회 재무위원장에게 올라간 국제문제조사연구소 특별연구보고 제4호. 박태준 사장은 &lt;이란•이라크간 간 휴전 성립 시 전후 복구에 우선 참여를 위한 시안&gt;이라는 이 문건 표지에 ‘경영정책실장 면밀히 검토 후 대책 요. 우선 신화건설에 나가있는 김광일 군을 그 지역에 사전 파견하여 정세를 파악하는 것이 좋을 듯 생각됨’ 이라는 메모를 써 경영정책실에 내려보냈다. 김광일 전 건설공정실장은 이 문서가 발단이 돼 1981년 1월 내란 중의 이란으로 급히 출장을 떠났다.</p></div>
<div style="width: 970px" class="wp-caption alignnone"><img title="05.jpg" src="http://www.poscoway.net:8101/UPFILE/S15010/board/editor/2018/6/20/20180620114436bb006805-ecea-4548-8610-abb011869c22.jpg" alt="1970년 6월 12일 당시 김상억 토건부장이 김광일 토목과장에게 보낸 업무지시서" width="960" height="727" /><p class="wp-caption-text">▲1970년 6월 12일 당시 김상억 토건부장이 김광일 토목과장에게 보낸 업무지시서. ‘강관파일 및 준설파이프 인양 건’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에는 ‘1.강관파일 인양 및 준설파이프 인양 계획을 6월 14일까지 수립(樹立)하고 2.강관파일 인양내역을 6월 13일한으로 검토하고 3.준설파이프 인양 직영비(直營費)를 산출하고 4.강관파일 및 준설파이프 인양 스케줄을 6월 14일까지 검토하여 5.건설기획관리실과 협의 하에 6월 15일 오전 중에 소장님께 브리핑하고 6.6월 15일 오후에 포항건설공사(CIA) 사장님께 토목과장이 직접 설명 올리도록 할 것 7.이는 사장님의 엄격한 지시사항이니 명심하시오’라는 업무지시가 담겨져 있다.</p></div>
<p><img class="alignnone" title="06.jpg" src="http://www.poscoway.net:8101/UPFILE/S15010/board/editor/2018/6/20/2018062011443665413879-51d1-4b2d-98fa-1fd83db60fa5.jpg" alt="김광일 前 건설공정실장 주요 경력 1938 황해도 봉산군 출생 1960 서울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 1967 해군 대위 예편 1967 호남정유 1968 포스코 입사 건설본부 과장, 토건부 과장, 공사부 차장, 이란 테헤란사무소장, 경영정책실 부장 1979 신화건설 상무이사 1981 포스코 부소장 1981 한양 이사 1993 강원산업 강건재기술연구소장 2000 대한토목학회 회장 2005 일본 토목학회 명예회원 상훈 2003 일본 토목학회 국제공헌상 수상 2010 ACECC(The Asian Civil Engineering Coordinating Council) 국제공헌상 수상 " width="960" height="727" /></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5/nam.png" alt="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width="450" height="137" usemap="#imgmap201852142921" /></p>
<map id="imgmap201852142921" name="imgmap201852142921">
<area alt="56편 이후 모아보기" coords="1,84,220,134" shape="rect" href="https://newsroom.posco.com/kr/tag/%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 target="_blank" />
<area alt="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coords="228,83,446,135" shape="rect" href="http://www.posco.co.kr/homepage/docs/kor6/jsp/news/posco/s91fnews002l.jsp?saveText=%B3%B2%B1%E2%B0%ED%BD%CD%C0%BA%C0%CC%BE%DF%B1%E2" target="_blank" /> </map>
]]></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남기고싶은이야기96] 황종현 前 포항스틸러스 단장 &#8220;축구로 인연… 마지막까지 과분한 ‘믿음’ 잊을 수 없어&#8221;</title>
				<link>https://dev-newsroom.posco.com/kr/%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96-%ed%99%a9%ec%a2%85%ed%98%84-%e5%89%8d-%ed%8f%ac%ed%95%ad%ec%8a%a4%ed%8b%b8%eb%9f%ac%ec%8a%a4-%eb%8b%a8%ec%9e%a5-%ec%b6%95/</link>
				<pubDate>Thu, 03 May 2018 11:36:16 +0000</pubDate>
				<dc:creator><![CDATA[parky]]></dc:creator>
						<category><![CDATA[사람과문화]]></category>
		<category><![CDATA[남기고싶은이야기]]></category>
									<description><![CDATA[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class="alignnone" title="title.jpg" src="http://www.poscoway.net:8101/UPFILE/S15010/board/editor/2018/4/30/20180430152754bb169f15-9bc2-4740-bef5-a90f7d2011a1.jpg" alt="&quot;축구로 인연...마지막까지 과분한 '믿음' 잊을 수 없어&quot; 황종현 前 포항스틸러스 단장 " width="960" height="727" /></p>
<p>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포스코투데이]</p>
<p><strong>ㅣ박태준 명예회장은 나에게는 인생의 멘토이자 스승, 은인</strong><br />
<strong>ㅣ가족을 제외하고 임종 전 마지막으로 명예회장 뵈어</strong><br />
<strong>ㅣ선수 은퇴 후에도 포항프로축구단장, 서울사무소장으로 일해</strong></p>
<p>&nbsp;</p>
<p>2011년 12월 13일 오후 5시 20분 신촌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포스코를 창업한 박태준 명예회장이 생의 마지막 끈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병실 앞에는 황경노 전 회장, 박득표 전 사장을 비롯하여 전현직 포스코 임직원과 가족이 병실 상황에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고, 아래층 대기실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주치의 장준 박사가 병실 문을 열고 나와 황종현 전 포항프로축구단장에게 말을 건넸다.</p>
<p style="padding-left: 30px;">&#8211; 잠시 후에 운명하실 것 같습니다. 들어가 보세요.</p>
<p>황 전 단장은 천근같은 발걸음을 옮겼다. 박태준 회장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승의 끝자락 그림자가 얼굴을 덮어가고 있었다. 그가 병실을 나온 뒤 3분 후에 장준 박사가 다시 나왔다.</p>
<p style="padding-left: 30px;">-운명하셨습니다.</p>
<p>“회장님께서 입원하신 후로 내가 오랫동안 곁을 지켰으므로 주치의가 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아닌 사람 중에서는 내게 임종 직전을 지켜보도록 한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가족 외에는 제가 마지막으로 회장님의 이승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운명하셨다는 주치의의 말에 머릿속이 온통 하얘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시는 뵐 수가 없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나에게는 인생의 멘토이면서 스승이요 은인이셨습니다.”</p>
<p>장옥자 여사는 그를 따로 불러 짤막하게 일렀다. 묏자리를 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보통이라면 밑도 끝도 없는 말일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는 이미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음속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생전에 고인과도 이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일이었다.</p>
<p>“꽤 이름이 알려진 지관(地官) 한 분과 함께 제일 먼저 찾아본 곳이 회장님의 고향 선산(경남 동래군 장안읍 임랑리)이었습니다. 회장님의 선친 내외분이 나란히 잠들어 계신 묘소 아래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으로 가본 데가 포항공대였는데, 홍대원 동원개발 사장과 함께 포항제철소 1고로가 멀리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서 한동안 말을 잊고 있었어요. 사실 거기도 갑자기 가본 것이 아니고 평소에 그런 생각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데가 포항 주택단지 내의 영일대 뒤쪽, 그러니까 부덕사 입구 앞이었어요.”</p>
<p>황 전 단장은 영일대 뒤쪽 그 자리가 박태준 회장의 유택으로 가장 좋은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양지바른 곳인데다 시야가 탁 트여 전망이 좋고, 평소에 사람 좋아하신 분인데, 접근성도 매우 양호한 곳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p>
<p>“생전에 회장님과 그쪽을 지나가면서 농 반, 진 반으로 그 자리를 말씀드린 적이 있었어요. 정정하게 활동하시는 분께 묏자리 말씀을 드린다는 게 좀 그래서 농을 섞었지만, 내 생각에는 참 좋은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회장님께서는 묏자리 말씀은 안 하시고 ‘내가 죽거든 미국식으로 하라’는 말씀만 하셨어요. 봉분(封墳)을 만들지 말라는….”</p>
<p>묏자리를 둘러보고 서울 빈소에 올라와 보니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모셔야 한다는 얘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장옥자 여사가 마지막으로 고향 선산과 포항의 두어 곳을 살펴보라고 한 것은 꼭 그 자리로 모시겠다는 뜻보다는 유족으로서 고인을 보내는 마지막 의식이었던 것으로 그는 기억했다. 현충원 상황을 알아본 이대공 전 부사장은 서울현충원에는 자리가 없으니 대전으로 모셔야 할 것 같다고 했다.</p>
<p>“그때 문상을 온 각계각층 인사들의 도움으로 서울현충원으로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분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아들 박지만 EG 회장도 요로(要路)에 전화를 하고 협조를 구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p>
<p>장례식 전날 몇몇 사람들이 서울현충원을 찾아가 여러 곳을 물색해 보았지만, 모두들 현장 사정에 어두웠으므로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현충원 측에서 권하는 자리가 있었다. 역시 그런 일은 아는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자리가 무척 좋아 보였던 것이다. 결국 현충원 측에서 잘 협조해 주어서 나중에 부부가 함께 누울 자리까지 마련해 장례를 치렀다.</p>
<p>&nbsp;</p>
<p><strong>축구선수 시절 점프력 상당해&#8230; &#8216;맘보&#8217;라는 애칭 붙어</strong><br />
<strong> 한홍기 감독… 선수 처우 개선, 조언 아끼지 않는 선생님 같은 존재</strong></p>
<p>맘보, 이는 축구선수 황종현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별명은 다소 악의적이거나 골려주는 식으로 붙여지는 경우가 많지만, 그에게 붙여진 ‘맘보’라는 별명은 차라리 애칭이라고 하는 게 어울린다. 맘보란 서양 음악의 한 갈래로서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두발, 복장 등에서 가장 앞서가는 패션 또는 그런 어떤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p>
<p>“축구 올드팬들의 기억에는 생생할 겁니다.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KBS 축구 해설위원 선영제 씨라고. 그분이 내게 붙여준 닉네임이에요. 나는 운동선수로서 키가 큰 편이 아니지만 점프력은 상당히 좋았어요. 서전트 점프가 1m였으니까. 축구 경기 중에는 서로 공중 볼을 따내기 위해 헤딩 경쟁이 이루어지는데, 내가 공중에서 공의 위치로 이동하는 이중 점프를 하면 선영제 위원이 ‘저게 바로 맘보 점프입니다’ 하고 해설을 한 것이 나에게 ‘맘보’라는 애칭이 붙게 된 연유입니다.”</p>
<p>그는 대전상고, 건국대학교 축구부를 거쳐 1967년부터 대한중석 축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당시는 모든 분야가 그랬지만 특히 운동선수들에 대한 대우는 물론 사회적 인식이 열악하기 그지없었고 프로구단은 꿈도 꿀 수 없는 시절이었다. 실업팀이래야 대한중석, 한국전력, 석탄공사 3개 팀이 전부였고, 군에서 운영하는 몇 개 팀이 더 있을 뿐이었다. 선수 숙소는 물론 훈련할 운동장도 없었고, 신분은 정식 사원이 아닌 임시직이었다.</p>
<p>“내가 중석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일로 얘기만 들었습니다. 1964년 박태준 사장이 취임해서 상동광업소를 시찰하는데, 축구선수들이 거기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으니 ‘축구 선수들이 여기서 뭐 하느냐’라고 물을 정도였어요. 다음 해인 1965년에 대한중석이 우승하고 나서 한홍기 감독이 박태준 사장에게 세 가지를 요구해서 관철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운동장 확보, 숙소 마련, 신분 전환 이렇게 세 가지…. 그런데 1972년 주주총회에서 대한중석 주주들이 예산 절감 방편으로 축구단 해체를 결정해버렸어요. 특별히 예산을 줄일 데가 없으니 축구단 해체가 가장 손쉬웠던 거지. 근무할 사람은 남으라고 해서 선수 다섯 명이 영등포 제련소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운동선수들이 그런 일을 하기가 어디 쉬웠겠어요.”</p>
<p>1967년 9월 11일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의 실수요자로 지명되어 중석 내에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후 이 멤버들이 유네스코회관으로 옮겨 종합제철 창설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한홍기 감독도 거기서 창설 멤버로 파견근무를 하고 있었다. 당시 황종현 전 단장은 제련소 근무도 할 수 없는, 오갈 데 없는 선수들을 챙겨 농협팀 창단을 추진했다. 농협에서는 그에게 대리급에 트레이너 자리를 줄 테니 선수 스카우트 작업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한홍기 감독과는 의논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어 유네스코회관을 찾았다.</p>
<p>“이건 조금 다른 얘기지만 당시 유네스코회관 멤버들 중에 대한중석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분은 여상환, 박준민 두 분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 선생님을 만나 농협으로 가도 되겠느냐고 여쭸더니, 조금 기다리라고 하시고는 위층으로 올라가셨어요. 그리곤 다시 내려오시더니 거두절미하고 ‘가지 마’ 이러시는 거야. 박태준 사장님과 의논을 하셨겠지. 그때 박태준 사장께서 앞으로 제철설비를 구매할 때 유럽 메이커들과 많은 접촉이 있을 텐데, 그 과정에서 그들과 축구 교류를 할 생각이니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신 걸로 기억해요. 사실 나는 원래 군 병참팀의 멤버였는데, 한홍기 선생님의 배려로 중석팀에서 훈련을 하는 특전을 누리다가 합류했어요. 그렇게 박태준이라는 거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겁니다.”</p>
<p>황 전 단장은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한홍기’라는 고유명사 뒤에 ‘감독님’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꼬박꼬박 ‘선생님’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감독님과 선생님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굳이 따질 필요 없이 그는 ‘선생님’이라는 말로 자신의 한홍기 감독에 대한 존경의 깊이를 드러내 보였다.</p>
<p>대한중석 축구단 해체로 갈 곳이 없이 떠돌던 선수들이 포항제철 촉탁사원으로 발령이 난 것은 1972년 3월 1일이었다. 이후 7·3종합준공 때 포항제철 축구단이 창단되어 정식 직원으로 신분이 전환되었다. 그런데 이 신생 팀이 제22회 대통령배에서 우승을 거머쥔 것은 창단 바로 다음 해인 1974년이었다.</p>
<p>“이 대회를 통해 포철 축구단은 일약 명문구단으로 떠올랐고 이회택 선수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어요. 당시 이회택 선수는 축구계 선후배 간의 처신 문제 등으로 축구계에서 밀려나 운동선수로서는 낭인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한홍기 선생님께서 포철로 불러들인 것이었습니다. 그로서는 개인적인 한풀이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측면 공격수가 올려준 공을 가슴으로 트래핑 해 그대로 때려 넣는 멋진 기술을 선보이며 축구 팬들로부터 ‘역시 이회택’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 대회가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했기 때문에 그는 국가대표로 화려하게 복귀했지요.”</p>
<p>이듬해 1975년에도 실업연맹전에서 우승하고 일본 원정을 나섰다. 도쿄 올림픽경기장에서 일본 우승 팀인 얀마디젤과 맞붙은 한일전은 자못 뜨거웠다. 얀마디젤은 가마모토, 모리 등 일본 최고의 축구선수들이 포진한 일본 최강 팀이었다.</p>
<p>“비가 쏟아져 수중전으로 치러졌는데, 우리가 전반에만 3골을 먹었어요. 잔디가 구불구불해 스파이크가 박히지 않는 어려운 그라운드 컨디션에 비까지 쏟아지는 가운데 3골을 만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었어요. 그런데 후반 들어 이회택 선수가 날고뛰면서 혼자 4골을 터뜨려 결국 우리가 4 대 3으로 이겼습니다. 김영선 주일대사가 불러서 홍건유 동경사무소장, 한홍기 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갔더니 대사께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더군요. 당시 권투선수 허버트 강 등이 연거푸 일본 선수에게 패해 교민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는데, 이번 포철의 승리로 그런 분위기가 말끔히 씻겨나갈 거라면서 크게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p>
<p>&nbsp;</p>
<p><strong>포철 축구단… 대학 선수들이 가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strong><br />
<strong> 좋은 선수 육성해 선수 확보에 어려움 겪는 다른 팀에 보내주기도</strong></p>
<p>이후 포철 축구단은 대학 선수들이 가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포스코는 몇 개 대학 축구선수들에게 3학년 때부터 장학금을 지원한 뒤 졸업 후 선수로 확보하기도 했다. 이렇게 우수 선수들이 대거 합류하자 그는 현역 은퇴를 결심했다. 그의 나이 34살 때였다.</p>
<p>“당시만 해도 후배들의 활동 공간을 넓혀 준다는 뜻에서 선배가 은퇴하는 것은 스포츠계의 미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포스코는 좋은 선수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키워서 선수 확보에 목마른 다른 팀에 흔쾌히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1980년 함흥철 감독이 할렐루야 팀을 창단할 때도 포스코에서 꽤 많은 선수를 보내 창단을 지원하기도 했어요. 박태준 회장님은 스포츠계에서도 그렇게 큰 분이셨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박태준 회장님이 안 계셨으면 오늘의 포스코가 있을 수 없고, 한홍기 선생님이 안 계셨으면 포스코가 오늘과 같은 명문 축구단을 보유할 수 없었을 겁니다. 포스코가 회사 창립과 함께 축구단을 창단한 것도 사실 박태준 회장님과 한홍기 선생님 사이의 교감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또 박태준 회장님께서는 한홍기 선생님을 체육계 인사로만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매우 훌륭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여러 부분에서 느꼈습니다.”</p>
<p>1976년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총무부 근무지원과 근무에 이어 비상계획부 경비계장과 독신료운영계장을 거쳐 1979년 비상계획부 경비과장에 보임되었다. 그는 경비계장으로 근무할 때 그 말썽 많은 직책에서 모함을 받아 고발을 당하면서까지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원칙에 따라 철저히 근무해온 것이 과장에 발탁된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p>
<p>“독신료운영계장을 두 달쯤 했을 때였습니다. 홍건유 총무이사께서 넥타이 매고 따라오라고 해서 갔더니, 사장실이었어요. 박태준 사장께서 하신 말씀은 ‘잠 좀 자자’, ‘물자 관리 잘해’ 이 두 마디였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비로소 경비과장 명령이 난 것을 알아챘습니다. 당시 제철소는 건설과 조업이 병행되면서 매우 어지러웠습니다. 건설, 조업 자재를 비롯한 온갖 물자들이 드나드는데, 이를 관리하는 데가 경비과였으므로 ‘물자 관리 잘해’라는 말씀은 이해하겠는데, ‘잠 좀 자자’는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어, 포항시내에 건설업체 임원들이 자주 가는 술집들을 찾아가 안주인으로부터 정보를 얻기도 했습니다. 부정을 저지르다 경비실에서 문제가 되면 한밤중에도 사장께 전화를 해대는 일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지금도 그 두 마디 말씀이 잊히지 않습니다.”</p>
<p>1984년에는 서울사무소 행정과장으로 보임되었다. 당시 서울사무소 행정과장은 비서실 소속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그때는 자의건 타의건 박태준 회장의 정계 진출 논의가 무성했으므로 그는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어야 했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포스코에서도 노조 설립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급기야 노조 추진 세력들이 포항 평민당사에 난입해 이를 저지하는 측과 마찰을 빚는 와중에서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사진이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박태준 회장은 더 이상의 불상사를 막기 위해 노동조합 설립을 승인했다.</p>
<p>“그렇게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을 때였어요. 하루는 김덕윤 비서가 ‘포항에 좀 가세요’ 하는 거야. 나는 직감적으로 포항 지역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세한 것은 가보면 알겠지 하는 마음으로 더 묻지도 않고 야간열차를 탔는데, 포항에 도착해 보니 그게 아니라 주거시설부장으로 명령이 나 있었어요. 나는 명령이 날 때마다 명령지에 내 이름 하나만 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기인사 때 많은 사람과 함께 난 것이 아니라, 꼭 무슨 일이 있어서 혼자 명령이 나는 거예요. 그것도 팔자라면 팔자겠죠.”</p>
<p>주거시설부에는 인덕 주택단지 단독주택을 아파트로 개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지 보상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라 있었다. 평당(坪當)으로 계산해서 보상했는데, 입주 이후 이 문제가 시끄러워졌다. 원래 소방도로는 개인 소유가 아니므로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데, 담당 간부가 잘 모르고 보상에 포함시켜 주겠다고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문제의 고삐를 쥐고 있는 사람은 설계부 직원의 부인이었다.</p>
<p>“연봉학 기성에게 부탁해서 그 사람을 만나보니 문제가 엉뚱한 곳으로 비화되어 있었어요. 당초 부지 보상 범위를 두고 시작된 문제가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감정이 악화되어 입주 아파트의 벽지, 장판, 타일, 싱크대, 창틀 등으로까지 확대된 것이었습니다. 문제란 조기에 수습하지 못하면 이런 식으로 커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입주민들을 만나 내가 최대한으로 조치할 테니 도와달라고 재삼 당부를 하고 주거시설부에 편성되어 있는 공사 예산으로 이미 입주가 완료된 아파트의 수리 작업에 들어가 10개월 만에 끝냈습니다.”</p>
<p>&nbsp;</p>
<p><strong>성실함으로 시설 관리에 완벽 기해&#8230;직원 가족에게도 인정받아</strong><br />
<strong> 1992년, 서울사무소장 겸 포항프로축구단장으로 보임</strong></p>
<p>그는 주거시설부장 재임 중에 YS와 주택단지에서 조깅을 함께 한 일을 떠올렸다. 1990년 2월 9일, 여당인 민주정의당,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 제3야당인 신민주공화당이 합친 이른바 3당합당으로 박태준 회장은 민주자유당의 민정계 수장이 되었지만, 당시 가장 유력한 여당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YS와의 관계가 그리 매끄럽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990년 무렵 박태준 회장이 김영삼, 김종필, 박준규 등 민자당 최고위 지도부 인사들의 부부동반 포항제철소 초청 행사를 마련했다.</p>
<p>“오신 분들이 청송대에서 주무셨는데, 다음날 아침 내가 YS의 조깅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YS는 해외 순방 중에도 조깅을 거르지 않으므로 코스 안내도 할 겸, 정보도 얻을 겸 내가 파트너를 자청한 것이었습니다. 시속 10㎞ 미만을 유지하면서 정확히 20분을 뛰더군요. 내가 ‘어떻게 그렇게 잘 뛰십니까. 젊은 놈이 못 따라가겠습니다. 내일부터 저도 운동 좀 해야겠습니다’ 하고 아부성 발언을 했더니 ‘허허, 통영중학교에서 축구선수를 했어’ 하면서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짓더군요. 그런데 나는 ‘그래서 잘 뛰시는군요’ 하는 말만 했지 내가 축구선수였다는 말은 안 했어요.”</p>
<p>샤워를 마치고 조찬장으로 들어설 때였다. 박태준 회장을 마주한 YS가 흡족한 듯 말했다.</p>
<p style="padding-left: 30px;">-박 회장, 이 사람 덕분에 아침에 잘 뛰었소.</p>
<p style="padding-left: 30px;">-아, 그 친구 축구선수 출신 황종현입니다.</p>
<p>“회장님의 그 말씀에 나는 도망을 치고 말았어요. 내가 축구선수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이런저런 말을 했으니 결국 쫑코가 된 셈이었지. 비서 김기수 씨로부터 YS는 한번 꽁하면 안 펴지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더욱 난감해지더군.”</p>
<p>당시 그는 가족과 떨어져 포항에 혼자 있었으므로 새벽에 일어나 혼자서 보일러실이며, 테니스장, 목욕탕 등 주택단지 공용 시설을 꼼꼼히 점검하고 다니면서 담배꽁초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 이런 일은 직원들보다는 직원 부인들에게 더 잘 알려질 수밖에 없었고 부인회에서는 그를 매우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주거시설부장 재임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92년 들어 서울사무소장 겸 포항프로축구단장으로 보임된 것이었다.</p>
<p>“그때 포스코는 서울사옥 건설 부지를 두루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회장님께서 지시한 곳은 4대문 안이어서 남대문 경찰서 앞에 위치한 국제그룹 소유의 건물을 건의했지만 ‘부도난 것 왜 사’ 하시면서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p>
<p>포스코는 여의도에 1000평의 나대지(裸垈地)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옥을 지으려면 2000평은 있어야 했기에 인접한 제일생명 소유 부지 1000평을 합쳐 같이 건물을 짓고 나눠 쓰자고 제의했으나 제일생명에서 거부했다. 강남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역삼역의 현대 모델하우스, 지금 삼성 사옥이 들어서 있는 강남역의 모델하우스, 지금 아산병원이 들어서 있는 송파지역의 현대그룹 소유 부지 등을 두루 알아보았으나 모두 자체 계획이 서 있어 매입이 불가능했다.</p>
<p>되돌아오는 길에 떠오른 것이 한국중공업이 소유한 경기고등학교 앞의 부지였다. 마침 당시 한국중공업은 안병화 전 사장이 위탁경영을 맡고 있었고 김진주 전 부사장이 비서실장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때가 맞지 않았다. 골프 연습장이 들어서 있던 그 땅은 이미 팔린 후였다.</p>
<p>“최종적으로 잡은 것이 지금 포스코센터가 들어서 있는 대치동 부지였어요. 그 부지는 동아건설그룹에서 운영하는 공산학원이 4500평, 소지주들이 500평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당시 최고의 인기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 씨가 200여 평을 소유하고 있었어요. 이 200여 평 때문에 한동안 밀고 당기기가 이어졌는데 결국 50억 원에 매입했고 나머지도 비슷한 가격으로 사들였습니다. 당시 사옥추진위원장이 조말수 전 사장이었는데, 결국 사옥 지어놓고 박태준 회장, 정명식 회장, 조말수 사장 모두 자리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말았습니다.”</p>
<p>&nbsp;</p>
<p><strong>1992년 대선 때 YS-명예회장 간 담판 결렬 후 포스코 살생부 설 돌아</strong><br />
<strong> 명예회장의 정계 행보 … 여한 없이 싸워봤다면 하는 아쉬움 남아</strong></p>
<p>구단장을 맡아 1992년 실업연맹전에서 우승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해 연말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가 문제였다. YS는 박득표 사장을 통해 박태준 회장에게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했지만, 박태준 회장은 거절했다. YS가 그해 10월 광양까지 찾아갔지만 결국 회담이 결렬되었고, 이후 박 회장은 남방정책을 핑계로 해외에 체류하면서 선거에 관여하지 않았다.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YS가 당선된 뒤 개최된 1993년 포항제철 주주총회에서 결국 박태준 회장은 회사를 떠나야 했다. 당시 권력 핵심부에서 포스코 살생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p>
<p>“살생부에는 36명이 올랐는데 나도 거기 포함되었어요. YS가 당선된 뒤 서울사무소장을 그만두고 포항으로 내려가 축구단장만 맡고 있었는데, 조말수 사장 체제가 들어선 후 장중웅 상무가 서울로 좀 오라고 하더군요. 피차 모든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 상무의 이야기나 나의 대답이나 매우 간단명료했습니다.”</p>
<p style="padding-left: 30px;">-무슨 뜻인지 아시죠?</p>
<p style="padding-left: 30px;">-네, 압니다.</p>
<p>“사장실로 찾아가 ‘그만두게 됐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으나 조말수 사장은 아무 말이 없었어요. 다시 회장실에 들러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정명식 회장님께서는 문 앞까지 나와서 손을 잡아 주시더군요. 이후 1998년 유상부 회장 체제가 들어선 뒤 1년 남짓 포항프로축구 부사장 겸 단장을 맡기까지 5년 동안 야인으로 지내다가 대일기업을 경영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포항프로축구를 맡았지만, 대일기업 사장으로 있었으므로 구단 급여는 받지 않는 걸로 했습니다.”</p>
<p>박태준 회장이 정계에 발을 디딘 것에 대해 ‘신군부 차출설’, ‘포스코 외풍 차단설’ 등 여러 이야기가 나오지만, 황종현 전 단장은 경위야 어찌 되었든 간에 이왕 나갔으면 좌고우면하지 말고 여한 없이 싸워보기라도 했다면 아쉬움이 덜 남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포스코센터 2층 커뮤니티홀 옆 층계를 내려와 1층 로비에서 대각선으로 바라다 보이는 박태준 회장의 사진 입상(立像)을 향해 공손한 자세로 절을 하고는 테헤란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p>
<div style="width: 1210px" class="wp-caption alignnone"><img title="01.jpg" src="http://www.poscoway.net:8101/UPFILE/S15010/board/editor/2018/4/30/20180430152754f2c11e1b-575c-4102-ad65-c59b9b504430.jpg" alt="포철 실업축구단이 창단 후 첫 공식 경기날 박태준 사장이 황종현 포철 실업축구단 주장을 격려하고 있는 모습" width="1200" height="727" /><p class="wp-caption-text">▲1973년 7.3 준공식 날 포철 실업축구단이 창단 후 첫 공식 경기로 신일본제철과의 친선경기를 가졌다. 박태준 사장이 황종현 포철 실업축구단 주장을 격려하고 있다.</p></div>
<div style="width: 1210px" class="wp-caption alignnone"><img title="02.jpg" src="http://www.poscoway.net:8101/UPFILE/S15010/board/editor/2018/4/30/20180430152754b9179d45-eef0-4622-8c94-ac8a3bf54dd3.jpg" alt="춘계 실업연맹전 겸 일본파견팀 선발전에서 우승하고 기념촬영에 나선 포철 실업축구단 모습. 1975년도 춘계실업연맹 겸 일본파견팀 선발전 우승 1975.6.25 " width="1200" height="652" /><p class="wp-caption-text">▲1975년 6월 25일, 춘계 실업연맹전 겸 일본파견팀 선발전에서 우승하고 기념촬영에 나선 포철 실업축구단. 앞줄 우승 상장을 들고 있는 이가 포철 실업축구단 주장을 맡은 황종현 전 단장이다.</p></div>
<div style="width: 1210px" class="wp-caption alignnone"><img title="04.jpg" src="http://www.poscoway.net:8101/UPFILE/S15010/board/editor/2018/4/30/20180430152754c9bb4c2d-8399-4c94-b9b5-6b69a5687499.jpg" alt="스포츠조선에 황종현 포철 부단장이 프로 축구 진흥의 숨은 주역이자 축구인 출신 유일한 간부로 소개된 모습, 포철이 국내 스포츠 사상 최초로 스포츠 브랜드 프로스펙스와 스폰서 계약을 맺고 광고 유니폼을 입고 뛰게 되었다는 내용이 소개된 모습" width="1200" height="837" /><p class="wp-caption-text">▲1991년 12월 1일 자 스포츠조선에 황종현 포철 부단장이 프로 축구 진흥의 숨은 주역이자 축구인 출신 유일한 간부로 소개됐다. (오른쪽) 1993년 스포츠서울에는 포철이 국내 스포츠 사상 최초로 스포츠 브랜드 프로스펙스와 스폰서 계약을 맺고 광고 유니폼을 입고 뛰게 되었다는 내용이 소개됐다.</p></div>
<div style="width: 1210px" class="wp-caption alignnone"><img title="03.jpg" src="http://www.poscoway.net:8101/UPFILE/S15010/board/editor/2018/4/30/2018043015275442e9518f-e3a7-4fb1-b2e5-43aa0b466ec7.jpg" alt="청송대에서 열린 포항스틸러스 창단 40주년 기념 만찬장에서 포항스틸러스 역대 사장과 감독,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width="1200" height="720" /><p class="wp-caption-text">▲2013년 5월 26일 청송대에서 열린 포항스틸러스 창단 40주년 기념 만찬장에서 포항스틸러스 역대 사장과 감독,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첫 줄 왼쪽부터 김정남 감독, 김태만·김현식·차동해 前 사장, 이정식 포항제철소장, 장성환 사장, 박승호 포항시장, 이칠구 포항시의장, 이회택·최순호 감독, 황종현 前 단장.</p></div>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alignnone" src="http://www.poscoway.net:8101/UPFILE/S15010/board/editor/2018/5/3/20180503104857ff08ee41-24f3-4c4d-9b5f-018e564591e8.jpg" alt="황종현 전 단장 주요 경력 1944 대전 출생 1967 건구대학교 학사 1967 대한중석 축구단 선수 1973 포철 실업축구단 창단(창단선수러 입사) 1974 총무부 근무지원과 1977 비상기획부 경비2계장, 총무부 운영2계장 1979 비상기획부 경비과장, 서울사무소 행정실 과장 1988 서울사무소 행정부장, 주거시설관리부장, 체육구단운영부장 1991 서울사무소 행정 부장(부소장) 1993 체육구단운영반장 1998 포항프로축구 부사장겸 단장 1999 대일기업 사장" width="960" height="540" /></figure>
</div>
<p>우재욱 &lt;시인·작가&gt;</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mama2.jpg" alt="이글은 2017년 5월 도서출판 해냄에서 펴낸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박정희 시대의 경제외교사 증언'에 나온 양윤세 전 장관과 주익종 박사(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의 대담증언록 중&lt;종합제철소를 최종 성사시키다&gt; (339~391p)를 토대로 우재욱 작가가 재정리한 것입니다. kisa계약파기, 대일청구권 자금전용등 매우값진 포스코 창립당시의자료를 흔쾌히 제공하여주신 양윤세 전 장관과 주익종 박사께 감사드립니다[포스코 홍보실]" width="450" height="157"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figure>
</div>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5/nam.png" alt="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width="450" height="137" usemap="#imgmap201852142921" /></p>
<map id="imgmap201852142921" name="imgmap201852142921">
<area alt="56편 이후 모아보기" coords="1,84,220,134" shape="rect" href="https://newsroom.posco.com/kr/tag/%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 target="_blank" />
<area alt="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coords="228,83,446,135" shape="rect" href="http://www.posco.co.kr/homepage/docs/kor6/jsp/news/posco/s91fnews002l.jsp?saveText=%B3%B2%B1%E2%B0%ED%BD%CD%C0%BA%C0%CC%BE%DF%B1%E2" target="_blank" /> </map>
]]></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남기고싶은이야기 95] 양윤세 前 동력자원부 장관, KISA&#8221;한국의 종합제철 꿈, 더 멀어지게 했다&#8221;</title>
				<link>https://dev-newsroom.posco.com/kr/%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95-%ec%96%91%ec%9c%a4%ec%84%b8-%e5%89%8d-%eb%8f%99%eb%a0%a5%ec%9e%90%ec%9b%90%eb%b6%80-%ec%9e%a5%ea%b4%80-kisa%ed%95%9c/</link>
				<pubDate>Wed, 28 Feb 2018 00:00:00 +0000</pubDate>
				<dc:creator><![CDATA[posconews]]></dc:creator>
						<category><![CDATA[사람과문화]]></category>
		<category><![CDATA[IECOK]]></category>
		<category><![CDATA[KISA]]></category>
		<category><![CDATA[남기고싶은이야기]]></category>
		<category><![CDATA[양윤세]]></category>
									<description><![CDATA[1969년 4월 17일부터이틀간 프랑스 파리에서 IECOK(對韓國際經濟協議體) 연차총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등 IECOK 회원국들이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차관 공여에 난색을 표함으로써 KISA(韓國國際製鐵借款團)를 주체로 한 제철소 건설 계획이]]></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div class="article">
<p>1969년 4월 17일부터이틀간 프랑스 파리에서 IECOK(對韓國際經濟協議體) 연차총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등 IECOK 회원국들이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차관 공여에 난색을 표함으로써 KISA(韓國國際製鐵借款團)를 주체로 한 제철소 건설 계획이 벽에 부딪혔다는 것이 지금까지 정설(定說)로 되어 있었다.</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left">
<tbody>
<tr>
<td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dot5.jpg" alt="따옴표 icon " width="100" height="100" style="margin-right: 10px;" /></td>
</tr>
</tbody>
</table>
<p><b> <span style="color: #3f699d;">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8216;남기고 싶은 이야기&#8217;를 연재합니다.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lt;편집실&gt;</span> </b></p>
<p>&nbsp;</p>
<p><b>&#8211; KISA와의 계약 불합리성과 미온적인 태도 알고 IECOK 총회서 계약 파기<br />
&#8211;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 현실화위해 대일청구권자금 교섭 맡아<br />
&#8211; 창업의 주춧돌 하나를 놓은 사람으로서 창립 50주년 감회 새로워</b></p>
<p>&nbsp;</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pro_01_011.jpg" alt="양윤세 전 장관 주요 경력 1931 황해 곡산 출생 1959 고낼대 경제학과 1960 뉴욕대학원 외교학 석사 1961 하버드대학원 수료 1962 내각수반 비서관, 경제기획원 외자 총괄과 과장 1966 경제기획원 투자진흥관 1971 농림부 농정담당 차관보 1972 청와대비서실 경제3비서관 1974 주미국대사관 경제공사 1979동력지원부 장관 1981 경제기획원 정책자문위원 1982 한양그룹 회장고문, 동력자원부 정책자문위원 1984 미국코넬대 자문위원 1987 럭키금성그룹 미주지역담당 사장 1990 한라그룹고문 1992 한양 고문 1995 에어링크 코리아 회장, 한라중공업 고문 저서(증언록) 2017 &lt;고도성장 시대를 열다&gt;" width="360" height="1069"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10px;" /></figure>
</div>
<p>1969년 4월 17일부터이틀간 프랑스 파리에서 IECOK(對韓國際經濟協議體) 연차총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등 IECOK 회원국들이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차관 공여에 난색을 표함으로써 KISA(韓國國際製鐵借款團)를 주체로 한 제철소 건설 계획이 벽에 부딪혔다는 것이 지금까지 정설(定說)로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 경제기획원 투자진흥관으로 일한 양윤세 전 동력자원부장관은 내막을 소상히 증언해줬다.</p>
<p>&#8220;보통은 IECOK가 제동을 건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KISA 협약서에 미국, 독일, 영국, 이태리 등 네 나라의 정부 공공차관으로 종합제철공장을 건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어요. 차관 교섭은 KISA가 담당하고, 교섭에 필요한 모든 경비는 우리가 부담하도록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KISA 주도의 종합제철 사업이 지리멸렬하게 추진되고 있어서 우리는 그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어요.우리나라와 KISA간 계약이 체결되어 있어서 직접 계약을 파기할 수 없어서하는 수없이 회원국 정부들이 KISA에 차관을 제공할 계획이 없다는 의사를 표명해 줘야 했어요. 그걸 우리가 IECOK를 통해서 회원국 정부가 발표하도록 물밑작업을 한 겁니다.&#8221;</p>
<p>우리가 제철소 건설의 모든 기대를 걸고 있었던 KISA를 우리가 서둘러 깨버렸다는 사실이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에 그는 의미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p>
<p>&#8220;내가 미국과 사전에 따로 교섭을 해서 4월에 열리는 IECOK 총회에서 그런 자금을 공여할 계획이 없다는 걸 확실하게 발표해 달라고 했고, 독일에 가서도 역시 자금 지원 계획이 없다는 걸 분명히 해 달라, 그러면 우리는 KISA를 깨겠다,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러고 나서 세계은행을 중심으로 새로 연구를 해서 방법을 찾겠다, 그렇게 된 겁니다.&#8221;</p>
<p>그러나 그런 말로는 의문이 풀릴 수 없었다. 우리 정부에서 KISA를 깨겠다는 결정을 먼저 내렸다는 것인데, 1966년 12월 6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미국, 서독, 영국, 이태리 등 4개국 7개사를 회원사로 하여 KISA를 구성하고, 이듬해 1967년 4월 가협정과 10월 기본협정을 맺고, 그리고 1968년 말에서 1969년 2월에 일반기술계획서, 최종가격서, 확정재무계획서를 합의하기까지 동서반구(東西半球)를 돌면서 동분서주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정부였기 때문이다.</p>
<p>&#8220;1967년 10월 부총리가 장기영 씨에서 박충훈 씨로 바뀌면서 사단이 나기 시작한 겁니다. 1968년 말이나 1969년 초쯤이었는데, 박 부총리가 나를 부르더니 KISA 협약서를 주면서 좀 파악해 보라고 했어요. 기획원 업무 중에 다른 건 다 파악이 되고 알겠는데, KISA 협약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어요.&#8221;</p>
<p>당시 그는 기획원 국장으로서 투자진흥관으로 있었는데, 박 부총리가 소관도 아닌 다른 국장에게 그런 일을 시킨 것은 그냥 적당히 파악해 보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문제가 있는지 파헤쳐 보라는 지시였던 것으로 기억했다.</p>
<p>&#8220;KISA와의 협약을 담당해서 쭉 끌고 온 건 황병태 국장이었습니다. 부총리로서는 담당자에게 검토를 맡겨서는 제대로 문제점이 밝혀질 수 없다고 보고 나에게 지시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디나 그러하겠지만 특히 기획원에서는 남이 하는 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지 않는 게 관례로 되어 있었습니다. 모함처럼 비치니까요. 그래도 그때 나는 종합제철소 건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건 확실히 느끼고 있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몰랐지만. 나로서는 부총리가 검토해 보라고 하니까 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협약서를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몇 장 넘기다 보니까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견딜 수가 없는 거야.&#8221;</p>
<p>제철차관 교섭을 위한 모든 경비는 한국 측에서 부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협약을 깨려면 회원국 정부가 자금 제공을 거부한다는 확정이 있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경비니 뭐니 하는 것은 무조건 한국이 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 사람들이 달라는 대로 다 줘야 하는데, 계산해 보니 그때 그만둔다고 해도 한국에서 70만 달러를 내놔야 했다. 앞으로 이게 얼마나 더 소요될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차관확정계획서까지 제출받은 후 200일간은 차관을 교섭토록 되어 있으니, KISA안을 갖고 시간이 마냥 흘러갈 수도 있었다.</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011.jpg" alt="1967년 4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의 KISA 대표단 접견 모습" width="450" height="511"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figcaption>1967년 4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의 KISA 대표단 접견 모습.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 왼쪽 양윤세 투자진흥관(경제기획원 국장), 오른쪽 장기영 부총리.(국가기록원 CET0023648)</figcaption></figure>
</div>
<p>&#8220;미국 측에 알아봤더니 미국 정부에서는 아무도 차관 교섭에 관해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미국 정부 자금이 들어간다고 되어있는데도 말입니다. AID개발차관 같은 공공차관이든 아니면 세계은행 자금이나 최소한 수출입은행 자금 정도는 들어가야 하는데, 알아보니 자금 교섭한 게 없었어요. 독일 쪽도 내가 한독 관계 담당하면서 살펴봤는데 마찬가지에요. 거기도 자금 제공할 계획이 없다는 거야. 나는 KISA가 좀 이상하다는 정도는 느끼고 있었지만, 막상 내용을 들어다보니까 미국이나 독일에서 진척된 게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KISA 사람들이 달라는 대로 계속 돈을 내야 하고요. 부총리에게 사실 그대로 보고했더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되묻는 거야. 그래서 내가 깨버리자고 했지. KISA에 맡기고 경비 대주는 거 없애버리고, 직접 우리가 무슨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더니, 박 부총리도 좋다고 했습니다.&#8221;</p>
<p>&nbsp;</p>
<h2>제철소 건설 무산 리스크 무릅쓰고 KISA 협약 파기 추진</h2>
<p>당시 KISA와의 협약서에는 KISA가 일반설계서, 최종가격서, 차관확정계획서를 작성해 우리 정부에 제출하고, 우리 정부의 차관 도입을 도와 제철소 건설에 착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제철소 건설의 ABC를 모두 KISA가 대신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KISA를 깨버리면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되는 일이었다.</p>
<p>&#8220;맞아요. 무산되는 거죠. 그러니 예사 이야기가 아니었죠. 그래서 박 부총리에게 먼저 김학렬 경제수석과 의논을 하고 대통령께 보고하라고 말씀 드렸더니, 나더러 갔다 오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바로 청와대경제수석실로 찾아가 김 수석에게 KISA로는 일이 안되겠으니 깨야겠다고 했어요. 김 수석이 무릎을 탁 치면서 이제 제대로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시간을 잡아줄 테니 그때 대통령께 말씀 드리라고 하더군요.&#8221;</p>
<p>김학렬 수석에 대해 그는 &#8216;감정이 강한 분&#8217;으로 묘사했다. 김학렬 수석도 종합제철소 건은 KISA 같은 남의 손에 맡겨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 수석은 거의 감정적으로 KISA를 부정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은 기획원에 있을 때부터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p>
<p>&#8220;다음날 대통령께 직접 보고를 드렸습니다. 김 수석, 박 부총리, 나 이렇게 셋이서 들어갔는데, 설명은 내가 했어요. &#8216;이러이러한 관계인데 이대로 둬선 도저히 안 될 테니까 다시 생각해야겠습니다. 이건 깨는 게 좋겠습니다.&#8217; 하니까, 대통령께서 두 말 안 하시더구먼. &#8216;그렇게 해&#8217; 그러고는 끝이었어요.&#8221;</p>
<p>KISA를 깨기로 했다면 제철소를 새로 추진한다는 계획이 있어야 했지만, 그때까지는 따로 내놓을 만한 대안이 없었다. 그는 아무튼 KISA안은 잘못됐으니 폐지하고 우리가 직접 추진하되, 세계은행과 IECOK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나갈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만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KISA와의 협약서에는 차관확정계획서를 제출한 후 200일 이내에 양측이 그 차관 조달계획을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 양측 모두 추가적 책무 없이 계약이 해지되는 걸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KISA를 깨려면 미국 AID나 수출입은행을 상대로 한 사전 정지작업 내지는 확인 작업이 필요했다.</p>
<p>&#8220;KISA를 깨기 위해서는 차관을 줄 수 없다는 회원국 정부의 의사를 미리 확인해야 했지요. 때마침 1969년 3월 27일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이 서거함에 따라 조문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갈 일이 생겼고, 그 참에 미 AID나 수출입은행에 가서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조문을 마치고 나서 친분이 두터웠던 데이비드 케네디 재무장관을 거쳐 AID의 존 블리트(John Bulitt) 차장보를 만났어요. 그 사람이 다음 달에 열리는 파리 IECOK 총회에 참석하게 돼 있었거든. 그 사람에게 물었어요, KISA를 통해 한국의 종합제철소 차관 공여 요청을 받은 게 있느냐고. 그런데 자기네는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과 관련해 KISA로부터 그 어떤 교섭도 받은 바가 없다는 거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 건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KISA에서는 이 사람들과 교섭했다고 우리에게 활동비를 요구했는데···.&#8221;</p>
<p>그는 존 블리트 차장보에게 한국 측의 의중을 전달했다. 한국에서 KISA를 깨야겠으니 AID에서 자금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걸 공식적으로 발표해 달라고 요구했고, 존 블리트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한국이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에서 주도권을 쥐고 나가겠다면 AID도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p>
<p>&#8220;헨리 컨스(Henry Kearns) 미 수출입은행장도 만났는데, 그 사람도 자기네는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에 자금을 빌려줄 계획이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독일로 갔습니다. 그런데 독일도 역시 그런 계획이 없다는 거야. 독일에도 똑같이 요구했죠. 한국은 KISA를 깨고 세계은행과 상의해서 새 길을 찾겠으니 독일이 KISA에 자금을 지원할 계획이 없음을 밝혀 달라고, 독일도 그러겠다고 합디다. 그때 내가 독일에 간 일차적인 목적은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일으킨 이른바 &#8216;동베를린 사건&#8217;으로 단절된 한-독 경제협력을 부활시키기 위한 교섭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8216;파리 IECOK 총회가 끝나면 우리 부총리를 독일로 모시고 올 테니 그때 한독각료회담을 열자. 그래서 경제협력을 다시 부활시킨다는 걸 합의문으로 발표하자&#8217;고 제안하고, 파리로 가서 박충훈 부총리와 합류했습니다.&#8221;</p>
<p>&nbsp;</p>
<h2>차관 공여 부결키로 각국 대표와 사전협의 후 IECOK 총회 참석<br />
대통령, 부총리, 경제수석, 양윤세 4자간 추진해 비밀지켜져</h2>
<p>1969년 4월에 열린 파리 IECOK 총회에는 박충훈 부총리, 김학렬 경제 제1수석비서관, 황병태 기획원 경제협력국장, 양윤세 투자진흥관, 오원철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등 당시 정부 경제부처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참석했다. 그때 한국 대표단의 표면상의 공식적 입장은 종합제철소 건설과 관련해 미 수출입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는 것이었지만, 박충훈 부총리와 김학렬 경제수석 그리고 양윤세 투자진흥관 3인은 내막적으로 차관 공여를 부결시키기로 각국 대표와 사전 합의를 보고 회의에 참석했다는 것이 양 전 장관의 설명이었다.</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022.jpg" alt="파리 IECOK 총회 회의장 모습(왼쪽)과 주요 참석자들" width="450" height="238"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figcaption>파리 IECOK 총회 회의장 모습(왼쪽)과 주요 참석자들. 왼쪽부터 양윤세 투자진흥관, 박충훈 부총리, 레이몬드 굿맨 의장, 김학렬 경제수석, 미상, 유솜(USOM)처장 코스탄조</figcaption></figure>
</div>
<p>&#8220;당시 이 내용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대통령, 부총리, 경제수석 그리고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밖으로 새나가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비밀이 지켜진 겁니다. 아무튼 파리 IECOK 총회는 우리의 각본대로 진행되었어요. 미국, 독일은 정부 자금을 줄 계획이 없다는 걸 정식으로 발표했고, 미국 AID는 &#8216;지금으로서는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 자금을 지원할 아무런 계획이 없고, 앞으로 세계은행이 중심이 되어 검토한다면 그때 가서 충분히 살펴보겠다&#8217;고 했어요. 미국과 독일이 차관 공여 계획이 없다고 확정적으로 발표했으니, 그걸로 KISA는 더 이상 우리 종합제철소 사업을 맡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겁니다.&#8221;</p>
<p>당시 KISA에서는 어떻게든 수출입은행과 교섭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미국 정부에서 세계은행으로 하여금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사업은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내게 해 결국 부결시켰다고 전해져 오는 사실에 대해 그는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p>
<p>&#8220;KISA는 미국 정부의 돈으로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겠다고 했지만, 미국 정부는 찬성할지 반대할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게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수출입은행도 모르고 있었어요. 수출입은행장은 KISA에서 교섭해온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하더군요. 그러니까 제대로 교섭을 안 한 겁니다. 세계은행이 IECOK 총회에 &#8216;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이 타당성이 없다&#8217;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제대로 스터디한 결과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세계은행은 미국 정부 의견을 따라가는 입장이었으니까 한국에 종합제철소가 시급하지 않다는 의견을 내서 KISA 안을 없애버린 겁니다. 자기네는 그때부터 스터디해서 방도를 찾겠다고 한 거예요.&#8221;</p>
<p>IECOK 총회가 끝난 후 양윤세 전 장관은 한독경제각료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로 갔다. 그는 미국 수출입은행과의 교섭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다른 제철 차관선을 모색하기 위해 간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오원철 전 경제수석이 쓴 책에 &#8216;양 전 장관이 제철 차관선을 구하려고 서독에 갔다&#8217;고 한 내용도 그는 부정했다.</p>
<p>&#8220;오 전 수석도 내막을 몰랐으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때 IECOK 총회 참석 멤버들이 독일까지는 같이 같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독일에 간 것은 동베를린사건 때문이었어요. 그 일로 인해 한-독 관계가 경색되었는데, 정치적인 관계는 따로 논의하더라도 우선 경제 문제부터 매듭을 풀기 위해 간 것이지, 새로운 차관선을 찾기 위해 간 것이 아니에요. 그건 박 부총리, 김 수석 그리고 나만 아는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때 박 부총리는 기분이 무척 좋았어요. 파리에서 KISA 문제 해결되었지, 독일에서는 한-독 간의 경제 문제가 해결되었지, 그랬으니 기분이 좋았던 거야. 이제 미국 닉슨 행정부의 새 관료들을 만나 협력 체제를 갖추는 일만 남았다며 무척 고무되어 있었습니다.&#8221;</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031.jpg" alt="미국 방문 중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미 주요 인사를 초청해 열린 만찬회(black tie dinner)모습" width="450" height="230"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figcaption>1969년 4월 말, 미국 방문 중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미 주요 인사를 초청해 열린 만찬회(black tie dinner)모습. (왼쪽 사진)왼쪽부터 양윤세 투자진흥관, 데이비드 케네디 미 재무장관,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전 국방장관). (오른쪽 사진)왼쪽부터 조지 볼 전 국무차관 부부, 박충훈 부총리, 양윤세 투자진흥관.</figcaption></figure>
</div>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061.jpg" alt="박충훈 부총리 일행이 백악관에서 미국 닉슨 대통령과 면담하는 모습" width="450" height="451"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figcaption><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1969년 5월 1일박충훈 부총리 일행이 백악관에서 미국 닉슨 대통령과 면담하는 모습. 1 닉슨 대통령, 2 박충훈 부총리, 3 김동조 주미대사, 4 양윤세 투자진흥관.</figcaption></figure>
</div>
<p>박충훈 부총리의 회고록 &lt;이당 회고록&gt;(박영사, 1988)에는 KISA 측이 1968년이 다 지나도록 계약을 이행하지 않아서 종합제철 건설이 큰 차질을 빚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가 KISA 안을 무산시키기로 IECOK 총회 전에 결정한 사실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4월의 IECOK 총회에서 자신이 회원국 대표들에게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자본 협력을 요청했으나, 세계은행과 미 수출입은행이 타당성 재검토를 주장하고 서독 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최종 무산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양 전 장관은 다른 증언을 했다.</p>
<p>&#8220;그해 5월 말에 부총리에서 해임되었는데, 자신의 해임 사유를 감추고 싶어서 그랬을 것으로 봅니다.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귀국 비행기에 올랐는데, 기내에서 일본 신문을 보니 이 양반 조카가 간첩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어요. 그 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오늘 이야기의 주제가 아니므로 줄이기로 하고, 아무튼 조카의 간첩단 연루 사실이 박충훈 부총리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떨어뜨린 한 요인이 되었을 겁니다. 그밖에 대통령이 박 부총리에게 한계를 느낀 점도 좀 있었던 것 같고요. 세간에는 종합제철소 건설 프로젝트가 잘 추진되지 않아 박 대통령이 그를 해임하고 김학렬 수석을 해결사로 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박 부총리로서는 실제 해임 사유가 알려지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낫기 때문에 그렇게 유도한 것으로 보이고, 회고록도 그렇게 쓴 게 아닌가 싶어요.&#8221;</p>
<p>6월 2일 김학렬 부총리가 임명되었다. 취임 닷새 후인 7일에는 KISA와의 계약을 백지화한다는 보도가 나왔고, 경제기획원은 정문도 차관보를 단장으로 하고 노인환 경제협력국 공공차관 과장, 포항제철의 부장 등으로 구성된 새로운 태스크포스를 둔다고 발표했다.</p>
<p>&nbsp;</p>
<h2>청구권 자금 사용해 종합제철소 건설하자고日 외무성에 제안<br />
상공부의 종합제철소 건설방안 보고서 기초로 일본과 교섭나서</h2>
<p>&#8220;그 TF는 원칙적으로 기술자로 구성되었는데, 나는 거기에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당시 한국의 기술자란 사람들은 주로 상공부에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망라해서 기술단을 만들고 정문도 경제기획원 차관보를 단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 기술단이 일본 야하타제철소 사람과 협조해서 작업을 했는데, 거기 부장 한 사람이 아주 열심히 이 문제에 달라붙어 협력해 주었고, 거기서 종합제철소 건설 방안을 작성했어요. 기술단이 작업한 후에 세계은행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때 내가 나섰습니다. 나중에 내가 청구권 자금 건으로 일본과 교섭할 때 이 기술단에서 나온 보고서를 기초로 활동했죠.&#8221;</p>
<p>경제기획원 출신 인사들의 회고 잡지 &lt;경우(經友)&gt;에 실린 김재관 박사의 기고에 따르면, 이 기술단에서는 약 두 달에 걸쳐 작업을 진행, 8월 초에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기술단은 건설계획안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철강연맹, 철강회사 대표를 상대로 설명에 나선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8월 6일자 신문은 정문도 차관보, 박태준 사장 등이 그달 말 열릴 한일정기각료회의의 사전 정지 작업차 일본 출장을 떠났다고 보도하고 있다.</p>
<p>&#8220;그때 나도 한일정기각료회의에 앞서 일본 정부 관계자들에게 일본 자금에 의한 제철소 건설을 제의하러 도쿄에 갔습니다. 기술단 사람들은 기술 관계를 협의하러 갔고요. 그런데 비록 기술 관련 문제 때문이기는 하지만 내 상급자인 정문도 차관보가 와 있는데, 국장급인 내가 대표로서 일본 측에 요청하기가 조금 뭐한 거야. 그래서 정 차관보에게 같이 가자고 해서 외무성에 가서 공식적으로 &#8216;청구권 자금을 당겨 써서 종합제철소를 건설하자&#8217;고 제안했습니다. 내 직속상관이니까 대외적으로는 정 차관보가 요청한 걸로 보였겠죠. 그러나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아요. 상관이 현지에 있으니까 내가 예의상 같이 가자고 한 것뿐이에요. 그 다음부터는 청구권 자금 교섭은 내가 맡았습니다.&#8221;</p>
<p>KISA 안이 무너진 후 대일청구권자금을 종합제철소 건설에 사용하고 차관도 일본으로부터 도입하기로 한 것과 관련, 그것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오원철 전 수석은 저서에 &#8216;IECOK 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길에 일본 호텔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양윤세 투자진흥관이 아이디어를 낸 것으로 기록했고, 김정렴 전 대통령 비서실장도 양 투자진흥관의 아이디어라고 증언했다. 반면 박태준 사장의 전기에는 1969년 미국에서 귀국하는 길에 하와이에 들렀을 때 대일청구권자금 사용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p>
<p>&nbsp;</p>
<h2>대일청구권 자금전용 아이디어 누가 냈는지 답변할 수 없어<br />
다만 김학렬 부총리가 청와대에서 결정했다고만 알려와</h2>
<p>&#8220;종합제철소 건설에 청구권자금을 쓰자고 한 게 내 아이디어냐, 박태준 사장 아이디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답변할 수가 없어요. 다만 김학렬 부총리가 나에게 &#8216;청구권 자금을 당겨 쓰기로 청와대에서 결정했습니다. 양 국장이 교섭을 맡되 양 국장 뜻대로 해서 이걸 빠른 시일 내에 매듭지어 주세요&#8217; 하고 지시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걸 결정하는 순간에 무슨 회의를 했는지, 아니면 김 부총리가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았는지, 또는 김 부총리가 건의한 것인지, 회의에 누구누구가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 박태준 사장을 불러서 물어보았는지는 내가 몰라요. 그러니까 박태준 사장이 말했다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지 못합니다.&#8221;</p>
<p>박태준 사장의 전기에는 1969년 1월 하순 자신이 미국 피츠버그로 가서 KISA의 주도 회사인 코퍼스사의 포이 회장을 만나 거듭 차관 제공을 요청했지만 포이가 사업의 경제성이 없다고 거절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귀국길에 하와이에 들러서 와이키키 해변의 모래사장에 누워 잠시 쉬는 중에 불현듯 청구권자금 사용 방안이 생각났다는 것이다. 바로 대통령에게 전화를 해서 청구권자금 사용 방침을 허락받았고, 일본에 들러서 청구권자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일본 측에 협조 요청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중앙일보 2004년 8월 29~31일 연재분). 이에 대해 양윤세 전 장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p>
<p>&#8220;그렇게 썼다면 그건 말이 안 됩니다. KISA는 우리 정부와 마찬가지로 차관을 성사시켜야 할 입장이었는데 포이 회장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죠. 차관이 성사되면 자기네가 제철소 설비와 기자재를 공급하게 되고, 기술 제공 대가를 단단히 챙길 수 있는데, 차관을 얻자고 나서야지 왜 반대를 했겠어요. 또 그가 거절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어요. 차관은 미 수출입은행 등에서 제공하는 건데, KISA가 거절할 일이 아니었죠.&#8221;</p>
<p>&nbsp;</p>
<h2>양윤세 국장은 청구권자금 교섭담당, 기술단은제철소 건설계획 입안<br />
日 정부에 한국 제철소 건설에 대한 타당성 알리고 절차 밟아</h2>
<p>김학렬 부총리는 기술단을 만들어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제철소 건설계획 입안 작업을 맡기는 한편으로 양윤세 국장에게는 자금 측면에서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를 현실화하기 위해 대일청구권자금 교섭을 맡겼다는 것이다. 양 전 장관은 당시 일본 측과 교섭하면서 우시바 외무성 차관에게 처음 이야기를 했다고 털어놓았다.</p>
<p>&#8220;그에게 미리 귀띔을 해놓았더니 8월 초 일본에 도착한 날 저녁에 통산성, 대장성, 경제기획청 등의 웬만한 간부들을 모두 저녁식사 자리에 불렀어요. 그렇게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 거였죠. 그 모임을 통해 일본 측 정식 대표 네 명이 결정됐습니다. 외무성의 참사관, 말하자면 연락관 비슷한 창구 역할 하는 이, 통산성의 하나무라 신페이라는 사람, 대장성 외환국의 국장, 이 사람이 나중에 후생성 장관이 됩니다. 그리고 단장 격으로 경제기획청의 아카자와 쇼이치(赤澤璋一), 이 사람이 통산성의 중공업국장을 오래 해서 이 계통에는 정통한 전문가였지요. 그래서 이 네 명이 나를 상대하게 된 겁니다. 이후로는 내가 일본에 가기만 하면 우시바 차관이 내 저녁을 예약해 두곤 했어요. 그리고는 그 네 명을 불러요. 일본에서는 자기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매우 싫어하니까, 거기에 영향력 있는 누구 한 사람만 만나서는 일이 안 돼요.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가서 만나고, 필요할 때는 같이 만나고 해야지 그중에 누구 한 사람에게 치우치면 될 일도 안 됩니다.&#8221;</p>
<p>흔히 일본을 &#8216;안면 사회&#8217;라고 하듯이 개인적인 친분이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일청구권자금과 관련된 문제는 국가와 국가 간의 문제였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입장, 예를 들어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 사업을 지원하는 것은 일본에 나쁘지 않거나 이익이 된다는 판단이 서야 하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은 적극적으로 한국을 도왔는데, 그는 그 이유를 차분히 설명했다.</p>
<p>&#8220;처음에 우시바 차관에게 &#8216;비공식적으로 내가 이 일을 맡아서 왔으니 내 일을 도와주시오&#8217;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더니 동조해 주더군요. 그 사람은 당시 한국의 제철소 건설에 대한 타당성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일본에는 그거 좋은 생각이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절차를 중요시하더군요. 기술부서의 대표 기술자들을 뽑아서 그 대표단으로 하여금 나와 회담을 하도록 하고, 그 결과를 한일각료회담에 올려서 승인을 받고, 자기네 기술단을 한국으로 보내서 기술 조사를 하도록 하고, 그 보고서에 의거해서 자기네가 나중에 최종 결정을 하는 그런 절차를 밟았어요.&#8221;</p>
<p>나중에 기술진이라고 해서 기술조사를 하러 왔을 때 대장성의 젊은 사무관이 던진 질문과 그 질문에 답한 내용을 양 전 장관은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p>
<p>한국에는 원료도 없고, 기술도 없고, 결국은 다 수입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한국에서 제철소를 하겠다고 그러십니까?</p>
<p>한국의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이었고, 비아냥거림이기도 했다. 그는 논리정연하게 반박했다.</p>
<p>그런 이야기는 한국을 일본에 항상 예속시키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철강 생산이 부족하면 제일 가까운 데서 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그러면 우리는 일본이 결정하는 가격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겠죠. 그런데 우리가 100만 톤짜리라도 하나 갖고 있으면 국내 생산이 있으니 일본에서 마음대로 가격을 매길 수가 없을 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제철 시설이 없으면 일본에서 국제 가격의 2배를 매긴다고 해도 우리는 그 가격에 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게 일본에 예속되라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071.jpg" alt="일본과의 청구권 자금 사용 교섭회의 모습" width="450" height="519"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figcaption><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일본과의 청구권 자금 사용 교섭회의 모습. 왼쪽이 한국측, 1 양윤세 투자진흥관.</figcaption></figure>
</div>
<p>&nbsp;</p>
<h2>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사장 각별히 아끼고 신임해<br />
청구권 자금 아이디어의 출처, 중요한 문제 아니야</h2>
<p style="line-height: 150%;">한일 협력이 열매를 맺어 103만 톤 규모의 포항제철 1기설비가 착공된 것이 1970년 4월 1일이었으니, 1966년 12월 6일 KISA가 정식으로 발족된 지 3년 4개월 만이었다. 포항제철 창립 주주총회가 열린 1968년 3월 20일을 기점으로 삼아도 2년이 더 지난 시점이었다. 기간 중 경제부총리가 3번이나 바뀌고 KISA가 와해되고 담당 공무원이 바뀌고 제철소 건설이 무산될 위기도 겪었다.</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081.jpg" alt="일본 민관합동조사단과 포항제철소 예정지에 방문했을 때 모습" width="450" height="506"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figcaption><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1969년 9월 하순,일본 민관합동조사단과 포항제철소 예정지에 방문했을 때 모습. 1 박태준사장, 2 일본측 아카자와 조사단장, 3 양윤세 투자진흥관.</figcaption></figure>
</div>
<p>&#8220;그런 와중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사장을 아꼈습니다. 최고회의 비서실장, 대한중석 사장, 그리고 대한중석에서 출자한 포항제철 사장 등의 요직에 보임시킨 것도 그렇지만, 그 후에도 박태준 사장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는 사실은 여러 각도에서 감지되었습니다.&#8221;</p>
<p>포항제철이 박태준 사장의 작품처럼 세간에 알려진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고, 포항제철이 성사되기 전까지의 어려운 과정에서는 박태준 사장이 한 게 별로 없다는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생각에 대해서도 양 전 장관은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p>
<p>&#8220;오 수석 말고도 그런 이야기를 한 분이 또 있었습니다. 정문도 차관보를 단장으로 한 그 기술단에서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한 사람이 KIST의 김재관 박사였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 그분이 내게 여러 번 전화를 했었어요. 박태준이 하와이 구상이니 뭐니 하면서 딴소리 하고 있는데, 그거 다 사기라는 거야. 그러면서 나더러 항의 반론을 제기해 달라고 했어요. 중앙일보에 연재된 박태준 사장의 자전 에세이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초창기의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 아니겠어요. 하지만 내가 굳이 나서서 박태준 사장을 깎아내리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포항제철을 크게 성공시킨 게 결국 박태준이었고, 박정희 대통령도 그에게 일임해서 그렇게 되었는데, 청구권자금 아이디어를 처음 낸 게 누구냐 하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8221;</p>
<p>&nbsp;</p>
<h2>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아··· 포스코의 행운 빌어</h2>
<p>양윤세 전 동력자원부장관은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듯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들춰 보이면서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포스코 초창기 역사를 기록한 사진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그 장면, 바로 1969년 12월 3일 &#8216;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한일 간 기본협약 체결&#8217; 사진이었다. 김학렬 부총리와 가네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주한 일본 대사가 한일기본협약서에 서명하고, 양 옆에서 박태준 사장과 이낙선 상공부 장관이 지켜보고 있는 낯익은 사진이었다.</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091.jpg" alt="경제기획원에서 종합제철 한일기본협약 체결 모습" width="450" height="511"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figcaption><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1969년 12월 3일,경제기획원에서 종합제철 한일기본협약 체결 모습. 이 행사가 상당히 의미있는 역사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김학렬 부총리 취임 6개월을 맞아 기획한 행사였다. 1 김학렬 부총리, 2 가네야마일본 대사, 3 박태준 사장, 4. 이낙선 상공장관, 5 양윤세 투자진흥관.</figcaption></figure>
</div>
<p>&#8220;포항제철에서는 이 사진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해 왔겠지요. 그런데 사실은 김학렬 부총리 취임 6개월을 기념해서 만든 행사였습니다. 부총리 비서실장이 &#8216;부총리 취임 6개월 축하 이벤트로 종합제철 건을 매듭짓는 행사를 만들 수 있겠느냐&#8217;고 내게 상의해 온 거야. 그래서 내가 일본 측에 &#8216;의향서 비슷한 걸 하나 만들어서 우리 부총리와 일본 대사의 사인 행사를 열면 어떻겠느냐&#8217;고 타진을 했습니다. 그간 교섭 과정에서 주한 일본 대사가 소외되어서 좀 서운해 있었는데, 내가 그런 제의를 하니 좋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행사를 만들어낸 겁니다. 한일 양국 간에 그런 사인이 꼭 있어야 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는데, 특별한 일처럼 꾸며진 거죠. 역사란 그렇게도 만들어지나 봅니다.&#8221;</p>
<p>여기까지 반세기 전, 포항제철 맹아기(萌芽期)의 비사(秘史)를 풀어놓은 양윤세 전 동자부 장관은 마지막으로 포스코에 보내는 덕담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p>
<p>&#8220;포항제철 창립 전후의 시기에는 국내외적으로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포스코가 초창기의 어려움을 딛고 우뚝 일어서서 세계 최강의 철강기업으로 성장해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는다니, 창업의 주춧돌 하나를 놓았던 나로서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죠. 행운을 빕니다.&#8221;</p>
<p>우재욱 &lt;시인·작가&gt;</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mama2.jpg" alt="이 글은 2017년 5월 도서출판 해냄에서 펴낸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박정희 시대의 경제외교사 증언'에 나온 양윤세 전 장관과 주익종 박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의 대담중언록 중 &lt;종합제철소를 최종 성사시키다&gt; (339~391p)를 토대로 우재욱 작가가 재정리한 것입니다. kisa 계약파기, 대일청구권 자금전용 등 매우 값진 포스코 창립 당시의 자료를 흔쾌히 제공하여 주신 양윤세 전 장관과 주익종 박사계 감사드립니다 [포스코 홍보실]" width="450" height="157"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figure>
</div>
</div>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5/nam.png" alt="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width="450" height="137" usemap="#imgmap201852142921" /></p>
<map id="imgmap201852142921" name="imgmap201852142921">
<area alt="56편 이후 모아보기" coords="1,84,220,134" shape="rect" href="https://newsroom.posco.com/kr/tag/%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 target="_blank" />
<area alt="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coords="228,83,446,135" shape="rect" href="http://www.posco.co.kr/homepage/docs/kor6/jsp/news/posco/s91fnews002l.jsp?saveText=%B3%B2%B1%E2%B0%ED%BD%CD%C0%BA%C0%CC%BE%DF%B1%E2" target="_blank" /> </map>
]]></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남기고싶은이야기 94] 류경렬 前 부사장, 인터넷 시대, PI로 글로벌 경쟁력 확보··· 미래성장 디딤돌 놓다</title>
				<link>https://dev-newsroom.posco.com/kr/%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94-%eb%a5%98%ea%b2%bd%eb%a0%ac-%e5%89%8d-%eb%b6%80%ec%82%ac%ec%9e%a5-%ec%9d%b8%ed%84%b0%eb%84%b7-%ec%8b%9c%eb%8c%80-pi/</link>
				<pubDate>Thu, 08 Feb 2018 00:00:00 +0000</pubDate>
				<dc:creator><![CDATA[posconews]]></dc:creator>
						<category><![CDATA[사람과문화]]></category>
		<category><![CDATA[ERP 시스템]]></category>
		<category><![CDATA[PI(Process Innovation)]]></category>
		<category><![CDATA[광양제철소]]></category>
		<category><![CDATA[남기고싶은이야기]]></category>
									<description><![CDATA[1973년 12월 12일, 수습 6기생으로 입사한 류경렬 전 부사장은 독일 연수를 가기 위해 연수교육을 마치고 독일어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해외 연수를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아버지가 6.25 전쟁 중에 좌익 활동을 했다는 기록 때문에 그 또한 신원 불량자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div class="article">
<p>1973년 12월 12일, 수습 6기생으로 입사한 류경렬 전 부사장은 독일 연수를 가기 위해 연수교육을 마치고 독일어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해외 연수를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아버지가 6.25 전쟁 중에 좌익 활동을 했다는 기록 때문에 그 또한 신원 불량자로 낙인찍힌 것이었다.</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left">
<tbody>
<tr>
<td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dot5.jpg" alt="따옴표 icon" width="100" height="100" style="margin-right: 10px;" /></td>
</tr>
</tbody>
</table>
<p><b> <span style="color: #3f699d;">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8216;남기고 싶은 이야기&#8217;를 연재합니다.</span><span style="color: #3f699d;"> </span></b><b><span style="color: #3f699d;">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lt;편집실&gt;</span></b></p>
<p><b>&#8211; 전사 프로세스혁신 이끌며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 기반 확보<br />
&#8211; 5년 이상 걸리는 전산화·정보화·최적화 30개월 만에 완료<br />
&#8211; PI로 도입한 각종 시스템은 지속적인 정비, 최적화해 나가야</b></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94941.jpg" alt="류경렬 전 부사장 모습 주요경력 1947 충북제천 출생 1974 연세대 금속학과 1983 포스코 입사 압연1부 열연공장, 생산관리실 공정1과 생산관리실 열연 공정계장, 선강분괴 계장 생산관리부 선강분괴공정과장, 공정조정과장, 광양생산기술부 생산계획과장, 차장 광양 생산관리부장, 공정부장, 생산기술부장 기술본부 기술행정실장, 기술실장, pi실장, 상무(정보시스템실, pi실, 수주공정실, 품질서비스실, 판매생산계획실 담당) 전무이사(마케팅부문,pi실,pi지원실,품질서비스실, 판매생산계획실담당) 전무이사(마케팅부문, pi실,pi지원실,판매생산계획실,품질서비스실) 포항제철소장(부사장) 2006 rist 원장 상훈 1976 국무총리 표창 2004 철탑산업훈장 " width="360" height="1005" /></figure>
</div>
<p>1973년 12월 12일, 수습 6기생으로 입사한 류경렬 전 부사장은 독일 연수를 가기 위해 연수교육을 마치고 독일어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해외 연수를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아버지가 6.25 전쟁 중에 좌익 활동을 했다는 기록 때문에 그 또한 신원 불량자로 낙인찍힌 것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나는 네 살 때 6.25 전쟁 중에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이야기만 듣고 자랐는데, 대학에서 ROTC에 지원했다가 아버지의 좌익 활동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지금도 모르고 있어요. ROTC는 군 장교 양성 과정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산업체에서 보내는 해외 연수도 갈 수 없다니 아뜩한 심정이었죠.&#8221;</p>
<p style="line-height: 150%;">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출신의 엔지니어로서 신예제철소의 가동에 꼭 필요한 해외 선진 제철소 연수에 참여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열연공장에 있었으나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체념하고 아무데나 보내달라고 해서 1975년 8월 옮겨간 곳이 생산관리부 열연공정과였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생산관리부에도 엔지니어들이 포진하고 있었지만, 그 일이 엔지니어의 본령은 아니었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자는 생각으로 일에만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렇게 당시의 답답함을 떨치고자 한 것이었어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1977년 4월 24일, 당시의 포스코 요원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제강사고가 났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열연공정과의 핵심요원으로 성장해 있었다. 대형 화재로 제강공정이 올스톱되었으니 용광로에서 생산한 쇳물을 받아줄 데가 없어졌고, 열연에서는 조업 소재인 슬래브를 공급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해외에서 슬래브를 수입해 압연조업을 이어가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슬래브 수급이나 해외 조달 관련 사항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그밖에 없어 브라질로 출장을 가야 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그때도 또 신원이 문제가 되었어요. 그런데 박태준 사장께서 신원보증을 서주셔서 처음으로 해외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슬래브 조달 문제를 매듭짓고 브라질의 국영 CSN을 거쳐, 나간 김에 미국의 LTV 등도 훑어보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제철소라면 모두 똑같은 것으로 알았는데, 해외 제철소들은 포항제철소와 구조가 사뭇 달랐어요. 그래서 포항제철소는 일본의 기술지원을 받아 지은 것인데, 앞으로 우리 손으로 제철소를 짓는다면 더 잘 지을 수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그런데 바로 그해 제2제철 건설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1974년 정부에서 추진하다가 여러 가지로 여건이 맞지 않아 포항제철로 흡수, 합병되었던 제2제철 건설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었다. 아직 건설 입지와 실수요자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포스코는 내부적으로 구체적인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박태준 사장이 제2제철은 국가적으로 꼭 필요하고 어차피 추진될 사업이라고 생각해 작업을 추진시킨 것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제2제철 실수요자가 포항제철로, 건설 입지가 아산만으로 결정된 상황에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시고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81년 11월 광양만이 제2제철소 입지로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당시 유상부 설비기술본부 차장이 주축이 되어 사업을 추진했는데, 나도 생산관리부 공정조정과 소속이었지만, 제2제철 건설 관련 일을 하고 있었어요. 브라질 출장 시에 가슴에서 꿈틀거렸던 그 무엇이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나는 지체없이 광양제철소 건설에 지원했습니다.&#8221;</p>
<h2>광양제철소 창설멤버로 13년간부문 최적화 개선에 힘써<br />
당시 정명식 부사장으로부터일하는 방법 많이 배워</h2>
<p style="line-height: 150%;">1983년 10월 24일 그는 광양 생산기술부 생산기획그룹으로 명령이 났다. 그날은 광양제철소 발족일이었다. 정명식 부사장의 지휘 아래 광양건설본부가 현지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었지만 제철소 조직은 그날 처음 만들어졌다. 장세훈 제철소장, 김종진 부소장, 김영준부장, 이현일 차장, 박인백 차장, 류경렬 과장, 김정원 과장 등이 광양제철소의 창설 멤버였다. 당시 포항제철에는 광양 근무를 회피하는 분위기가 완연했지만,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바로 지원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효자 주택단지에서 누구네 남편은 포항에서 밀려서 광양으로 갔다는 등의 소문이 돌 정도로 광양을 회피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러나 나에게 있어 광양 시절은 지금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정명식 부사장께서 건설과 조업 양쪽을 모두 관장하고 계셨는데, 매주 2회씩 회의를 주재하시면서 앞으로 광양만에 웅자를 드러낼 제철소의 모습을 구상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정명식 부사장으로부터 일하는 방법을 많이 배웠습니다. &#8216;아, 일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8217; 하는 생각에 무릎을 칠 때가 많았지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보고를 받는 정명식 부사장은 항상 미소를 띠고 있었다. 보고 내용에 동의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느 특정인만이 아니라 당시 보고에 참여한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야 너나없이 물류, 레이아웃, 설비 효율성, 인력, 경제성 등 모든 면에서 포항제철소보다는 훨씬 뛰어난 제철소를 건설해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견지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알고 보니 모든 걸 꿰차고 계시더군요. 잔소리하듯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당신의 뜻대로 일을 끌고 가시는 거였어요. 나는 1984년부터 1987년 1기 가동 시까지 생산관리 시스템 확립에 나름대로의 열정을 바쳤습니다. 이후 1996년 10월 기술본부 기술행정실장 명령을 받아 포항으로 돌아오기까지 만 13년을 광양에서 보냈습니다. 1987년 1기 설비 조업대비 계획을 세우면서 운송출하부는 부단위로서는 없어져야 할 부서라고 생각했고, 결국 내 생각을 관철시켰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그는 입사 이후 거의 10년간 몸담았던 포항 생산관리부 근무 시절부터 운송출하부는 축소되어야 할 부서로 생각하고 있었다. 포스코의 생산-판매는 전량 주문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제강 공정에서는 주문에 따라 강(鋼)의 성분이 결정된다. 자동차용, 건설용, 선박용, 기계용, 교량용 등 용도에 따라 탄소, 규소, 망간 등 첨가물의 종류와 양이 달라진다. 그리고 자동차용이라 해서 모두 같은 것이 아니고 품위에 따라 다양한 품종을 생산하게 된다.</p>
<p style="line-height: 150%;">마케팅 부서에서 주문을 받아 제철소에서 생산하는 체제이지만 제철소에서는 개개 수요자의 주문 단위대로만 생산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여러 주문량을 묶어 생산단위를 만드는 일 즉, 로트(Lot) 편성 작업은 생산관리부에서 수행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지금은 수주공정실에서 하고 있는 이 업무를 포항제철소 생산관리부에서 10여년 가까이 맡아오는 동안 나는 포스코의 수주-생산-출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연합철강과 일신제강이 국내 양대 냉연업체로서 많은 양의 냉간압연용 핫코일을 주문했는데, 생산관리부에서 연합철강에 공급할 품목으로 생산 지시한 제품을 운송출하부에서 일신제강에 출하하는 일이 흔히 일어나는 것이었어요. 물론 그 반대의 사례도 있었고 다른 모든 품목에서도 이런 일은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었어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그런데 운송출하부의 그러한 업무 수행 방식이 회사 규정상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판매, 생산관리, 출하 업무가 흡사 서로 다른 회사의 일처럼 따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판매에서는 수주할 때 가격, 물량, 납기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러한 고려 또한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전사적인 고려가 아닌 각 부문의 최적화를 추구하다 보니 일어나는 일이었다. 고객 입장에서는 주문한 제품을 빨리 공급받기 위해 어디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난감한 형편이었다. 판매, 생산관리, 운송출하 등 각 분야가 하나의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 편리한 대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p>
<h2>관할업무 최적화로 체선료 연간 200억 원 이상 절감 효과 거둬<br />
과장시절 전사 최적화 관점에서 효율적인 조직 편제 건의</h2>
<p style="line-height: 150%;">&#8220;광양에서는 운송출하부 없이 생산관리부에 출하과를 두어 거기서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과장 때부터 계속 그렇게 건의했더니 결국 받아들여졌어요. 그때 내가 끈질기게 건의해서 생기지 않은 부서가 운송출하부 말고도 구내운송부도 있었어요. 구내운송부에 원료 하역 기능이 있었는데, 그것도 생산관리부에서 맡도록 한 겁니다. 생산관리부는 스케줄링 개념이 생명이기 때문에 판매는 물론 원료 쪽과도 소통이 원활했습니다. 그래서 원료 운송 선박의 항해 정보를 파악해 원료 하역 일정과 조업, 정비 등 다른 일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함으로써 연간 200억 원 이상의 체선료(滯船料) 절감 효과를 거두었어요.내가 만약 부장이나 소장의 위치에 있었다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겁니다. 담당 과장이었기에 팩트를 핵심적으로 볼 수 있었고 기타사항 고려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1996년 10월 들어 그는 기술본부 기술행정실장에 보임되면서 포항으로 돌아왔다. 광양제철소 창설 멤버로 참여해 포항을 떠난 지 13년 만의 귀환이었다. 해가 바뀌어 1997년 촉발된 외환위기는 국내 산업계에 연쇄 도산이 이어지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지만, 해외 시장에서 탄탄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포스코는 이 풍파를 헤쳐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 사태는 포항 괴동역에 고로 슬래그가 산더미처럼 쌓이는 문제를 초래했다. 관계 부서에 물었더니 외환위기로 건설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시멘트 수요가 급감한 나머지, 시멘트 회사에서 슬래그를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술행정실장으로서 우선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고로 슬래그가 시멘트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용도를 알아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데, 20년 이상 그걸 판매했으면서도 그냥 시멘트 제조에 쓰인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정확한 용도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담당자 1명을 대동하고 단양, 동해, 영월 등지로 시멘트 회사 방문에 나섰어요. 알아보니 고로 슬래그가 시멘트와 같은 성분의 물질이었습니다. 산화칼슘(CaO), 산화규소(SiO2), 산화알루미늄(Al2O3)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품에 따라 조성이 조금씩 다를 뿐이었어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시멘트 회사들은 고로 슬래그가 필요한데도 외환위기를 핑계로 서로 담합해 그때까지 거래해온 톤당 2000여원대의 가격은 물론 운송비까지 포스코에서 부담해 달라면서 어깃장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카르텔을 깰 수 있는 길은 수출선(輸出先)의 모색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국내와 비슷한 가격으로 타이완(臺灣) 수출 길을 열었어요. 그랬더니 국내 수요처에서 서둘러 가져가는 바람에 괴동역이 싹 비워졌습니다. 고로 슬래그는 지금까지도 타이완으로 수출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이든 모르면 당하는 겁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1998년 12월 31일에는 PI실장으로 보임되었다. 이후 상무보, 상무 전무이사를 거쳐 부사장으로서 포항제철소장이 된 2004년 3월까지 5년여 동안 PI는 그와 함께 하였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1998년 말일은 명령상의 날짜이고 사실은 12월 18일 조직이 만들어져 거기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구택 사장께서 PI실장으로 지명해서 명령이 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나보다 먼저 다른 두 사람에게 맡겼지만,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세 번째로 나에게 떨어진 일이었어요. 그만큼 PI는 낯설고 험난한 일로서 기피 대상이었습니다.&#8221;</p>
<h2>황경노 부회장 시절 구상한 빅피쳐, 36개 과제로 세분화해 실현<br />
유상부 회장의 전폭적 지지와 포스코 조직력이 성공요인</h2>
<p style="line-height: 150%;">그는 구매, 생산, 판매 등의 계획 수립부터 제품 출하할 때까지가 PI(Process Innovation)의 영역이라고 했다. 포스코 업무의 전반을 다루는만큼 PI의 범위는 방대하였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그 당시에도 이미 포스코는 수주에서 생산계획, 제조 투입, 제조, 입고, 출하까지의 시스템이 매우 선진화된 제철소였습니다. 박태준 명예회장을 필두로한 당대 최고의 우리 선배들이 PI 도입 이전부터 대대적인 전산 투자를 통해 앞선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1996년 이후 인터넷이 급속히 발전하는데, 이걸 받아들이는 데는 소극적이었어요. 전산 시스템은 앞서 있었지만 거기서 나오는 데이터를 경영 자산으로 활용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PI를 추진하면서 데이터의 정보자산 활용에 역점을 뒀습니다. 소통화, 표준화를 통해 막힌 것을 뚫어야만 가치 있는 데이터가 나오기 때문이죠. 그 결과 다른 기업에서 5년 이상 걸린 전산화, 정보화, 최적화 작업을 2년 반 만에 완료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PI의 도입, 적용은 어느 기업, 어느 조직에서나 많은 거부와 저항, 심지어는 추진 조직에 대한 음해까지 각오해야 하는 프로젝트였다. 각 부서는 그동안 관행으로 굳어져온 나름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전통이지 이는 고질화된 타성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과감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이지 않고서는 저항에 부딪쳐 좌초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유상부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를 별도로 불러 지시하셨어요. 무엇보다 &#8216;매우 조심하라&#8217;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는 불만 세력들의 조직적인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슬기롭게 견뎌야 한다는겁니다. &#8216;이것은 업무 자체의 기술 문제가 아니고, 하나의 정치 게임이다&#8217;는 말씀에는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어요.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만약 도덕적으로 무너지면 그날로 추진 동력을 상실하고 만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외부 컨설팅 업체 전문가들이 PI 추진에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들은 기술자이면서도 세계적인 비즈니스 전문가들로서 사람 구워삶는 데는 선수라는 사실을 유념하라는 말씀도 계셨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8220;말씀의 요지는 과감히 혁신활동을 하되, 조심하라는 것이었어요. 포스코의 PI 추진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한 패키지 업체들의 시기, 질투와 모함도 예상될 수 있는 일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내의 저항 세력과 사외의 배 아픈 세력이 결탁할 수도 있다는 말씀까지 하셨어요. 유 회장께서는 PI 추진의 본질적인 문제는 물론, 추진 과정에서 본질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사소한 문제들까지 다 꿰고 계셨습니다. 일만 보고 나아가는 게 엔지니어의 자세지만 이 일은 다른 요소들을 잘 살피면서 가야 한다, 어쩌다 사소한 일에 걸려버리면 일을 잘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는 말씀에는 어떤 비장감마저 느껴지더군요. 나는 그때까지 현장에만 있었기 때문에 마케팅, 공급사, 고객사 등에 연이 전혀 없었는데, 이것이 이후 프로젝트 추진에 유리한 점으로 작용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8220;그리고 무엇보다 포스코 직원들과 관련회사의 헌신이 PI를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PI 실 요원들은 포스코센터 4층 사무실에서 간이침대를 놓고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헌신했습니다. PI는 일시에 전면적인 개혁인 빅뱅 방식의 혁신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반복적인 사전 테스트가 무척 중요했습니다. 절대적인 테스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요원들은 24시간 체제로 근무했습니다. 세계적인 부호인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 회장도 매달 PI 글로벌 콘퍼런스 콜에 직접 참석하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외 예측시스템을 담당했던 i2, 컨설팅의 PwC, 최신 슈퍼돔 서버를 제작한 HP, 통역사들도 무척 고생하였지요. 당시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그때, 우리는 우향우 정신으로 하나 되어 일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포스코의 PI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강점을 접목하는 작업이었다. 선배들이 구축한 튼튼한 오프라인의 몸체 위에 어떠한 환경 변화에서도 능히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미래의 IT날개를 다는 온라인화 작업이었다. 고객지향적으로 모든 프로세스를 새롭게 설계하고 세계 최초로 오라클 전모듈을 적용하고, 데이터 웨어하우스(data warehouse), 데이터 딕셔너리(data dictionary), EAI등의 시스템을 빅뱅 방식으로 도입한 방대한 규모의 프로젝트로 평가된다.</p>
<p style="line-height: 150%;">실제로 PI는 성과적인 측면뿐 아니라 양적인 측면에서도 당시 세계적인 규모였다. 30개월 동안의 산출 문서가 무려 8톤(A4지 세로 493km) 분량이나 되었고, 개발 화면수가 4,800종, 개발 장표 수는 320종에 달했다. 데이터 이행 항목 수는 43억개였고, 적용된 모듈만 해도 ERP 40개, SCP 11개, 맥시모 12개, 아르테미스 1개 등 64개에 이른다. 또한 이를 운영하는 서버인 HP사의 최신예 수퍼돔 1호기는 미국 상무성으로부터 전략 물자 수입 허가서를 받아야 했고, 2호기는 NASA에 납품 될 정도로 세계 최고 성능의 장비였다. 한편, PI실 인력은 1998년 12월 31일 30명에서부터 시작해 최대 970여명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멤버만 해도 포스코 직원(PI실 요원, 슈퍼유저), 포스테이터(現포스코ICT 모듈요원, 개발요원), PwC, 오라클, i2, 통역 등 다양한 출신 배경과 국적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PI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PI를 시작한 1998년도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1996년도에 비로서 웹브라우저(Web browser)가 일반에게 공개되면서 본격적인 상업화, 대중화를 맞이한 인터넷과 이메일은, 지금은 핸드폰을 들고 다니며 모든 것을 하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생활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규모의 경제가 소멸되고 디지털 문화로 전환되는 새로운 패러다임 앞에서전통적인 제조업으로 t(traditional)-비즈니스에 속하는 철강산업을 하는 포스코가 어떻게 하면 세계 철강산업을 리드하며 IT경영으로 고도의 효율과 부가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삶의 질도 향상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지요. 그 결과 PI를 하고 ERP를 도입하려고 하는 것은 t-비즈니스에 IT의 날개를 달아서 궁극적으로 e-비즈니스화 하자는 것이었어요. 유상부 회장은 그 당시 포스코를 큰 덩치에 작은 날개를 가져서 날지 못하는 새, 타조에 비유하셨어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8220;PI란 한마디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PI를 통해 모든 업무를 전체 최적화 차원에서 하되, 고객중심으로 업무절차를 혁신하고 이를 바탕으로 ERP를 도입하여 전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개방적인 시스템을 갖추어 나가고자 하였지요. 사실 포스코는 나름 방대한 량의 오프라인 정보와 처리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면서 기존의 오프라인 정보와 지식들을 표준화시키고, 디지털 데이터베이스에 축적해 함께 공유하고 외부와 소통시키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고, 이것이 바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가장 효율적이고 투명한 경영이며, 전자상거래에 바탕을 둔 디지털 경영의 첫걸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말이 쉽지잘 짜여져서 돌아가고 있는 오프라인 정보와 시스템을 새롭게 디지털 데이터화, 표준화시키고 투명하게 외부와 소통시킨다는 것은 정말 모두의 혁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PI는 수없이 &#8216;없애고, 버리고, 바꾼다&#8217;를 반복해서 외치며 궁극적인 고객 지향의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작업이었어요.&#8221;</p>
<h2>36대 과제 중심의 오너십 제도운영··· 전임원에게 오너십 부여</h2>
<p style="line-height: 150%;">PI라는 일 자체의 어려움도 어려움이거니와 이를 추진하기 위해 벌어야 하는 설득과, 소통 등의 작업은 본질이 아닌 일이면서도 본질보다 더 어려웠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PI를 추진했고 이를 통해 회사의 전 분야가 일신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PI추진팀에서 도출한 중점 추진 항목들은 실은 훨씬 이전 황경노 부회장 시절에 추진한 8대 과제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1980년대 말 무렵부터 황경노당시 부회장께서 2년여에 걸쳐 추진하시다가 기획실로 넘겨 마무리하라고 했으나 실제 각부서 업무에 녹아들게 하지 못하고 마무리된 것이 8대 과제였습니다. PI도 외부 컨설팅 업체에 아이디어를 구한 것이 아니고 포스코 임직원들이 자체적으로 도출한 과제였어요. PI를 추진하면서 우리는 우리대로 토론을 거쳐 36대 과제를 도출했는데, 내용을 놓고 보니 황경노회장께서 추진한 8대 과제를 세분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황 회장께서는 지금과 같은 명확한 개념으로서의 PI는 아닐지라도 이미 그와 유사한 개념의 그림을 그리고 계셨던 겁니다. 그러니 포스코의 PI 추진에서 외부 용역업체들은 스킬파트(Skill Part)만 담당했을 뿐 모든 아이디어는 포스코에서 자체적으로 도출한 것이었어요.</p>
<p style="line-height: 150%;">이처럼 36대 과제는 포스코가 30년 동안 일관하여 제철소를 경영하면서 나온 문제점 중에 임원진이 우선 순위를 두어 직접 선정한 것이고, 그 동안 수차례에 걸쳐 개선하려고 했지만 바꾸지 못한 포스코의 숙원 과제였기 때문에 과제 중심의 PI를 추진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했지요. 마스터 플랜 수립과정에서 자문역을 맡던 최병진 박사와 PwC가 To-Be 프로세스 별 오너십 제도를 주장했지만, 독특한 포스코 기업문화와 PI가 방대한 프로젝트임을 감안할 때 포스코의 PI 프로젝트는 다른 프로젝트와 달리 36대 과제를전임원에게 오너십을 부여하여 추진하도록 했어요. 그 결과 포스코 전체 임직원들이 한마음으로 PI를 추진하여 성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누구 몇 사람들이 한 일이 아닙니다.&#8221;</p>
<h2>ERP는 수단에 불과, 내부 역량에 따라 기업가치 향상 여부 결정돼<br />
기업 전체를 고려하지 않은 부분 최적화 마인드, 시스템 퇴보 초래</h2>
<p style="line-height: 150%;">PI를 추진하면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인데, 포스코처럼 잘 준비된 조직은 제대로 시너지를 발휘하면서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이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외부 컨설팅 업체의 분석이었다. 그런 고민 없이 진행해서는 성과가 나올 수가 없다는 견해였다. 흔히 ERP를 도입하면 PI가 다 된 것으로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ERP 시스템을 판매하는 업자들도 대개 ERP를 도입하면 PI가 완성되는 걸로 설명하죠. 그러나 ERP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 수단을 이용해서 어떻게 기업 가치를 높이느냐 하는 것은 회사의 내부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수단도 중요하지요. 황경노 회장께서당신의과제를현실화하지못하신 것은 당시에는 실업무에 적용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십 수년 후에 유상부 회장께서 강력히 밀어붙여 성공시킨 거지요. 유상부 회장께서 삼성재팬 사장으로 계실 때, 전임 사장이 PI의 밑그림을 그려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때 ERP와 PI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확신을 얻은 것이었어요.&#8221;</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1.jpg" alt="포항제철소 통합조업시스템 가동식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width="650" height="431" /><figcaption>2005년 1월 25일 포항제철소 통합조업시스템(MES·Manufacturing Execution System) 가동식에서 (왼쪽부터)포스데이타 이동근 상무, 신기철 부소장, 류경렬 포항제철소장, 김진일 PI담당 상무, 하상욱 부소장이 MES 가동 스위치를 누르고 있다.</figcaption></figure>
</div>
<p style="line-height: 150%;">PI 실현으로 포스코에는 실질적인 변화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현장의 실업무에서 생겨난 긍정적인 변화들은 곧 포스코의 경쟁력이 되었고, 그로인해 포스코는 경쟁 제철소보다 한 발 더 앞서 나가며 시장을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포스코 PI는 워낙 광범위하게 추진된 프로젝트이다 보니 특별히 어떤 성과를 &#8216;PI의 결과다&#8217;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첫 번째는 45일이던 제품의 납기가 PI를 통해 15일로 줄인겁니다. 업계에서는 정말 천지가 개벽되는 것과 같은 결과였지요. 기존의 납기가 1/3로 줄어든다는 건 포스코뿐만 아니라 고객입장에서도 계산할 수 없는 부가가치가 있어요. 고객이 납기를 문의하면 즉시 대답해 줄 수 있게 되었고, 납기 적중률이 높아진 것은 물론, 제품 재고일수도 줄고, 원자재 재고량도 줄고, 납기 단축으로 좋아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p>
<h2>PI로 납기 단축(45→15일) 하고 제품 판매 수익성 높여<br />
MRO 자재 표준화(35만→11만 종) 및 일일 결산 체제 구축</h2>
<p style="line-height: 150%;">&#8220;두 번째로는 PI 추진으로 판매 제품별 개별 원가와 수익성을 판매원이 알고 제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결과 판매원은 자연스럽게 수익이 최대가 되는 제품을 더 많이 판매하고, 수익이 낮은 제품들은 그 원인을 파악해 생산단가 절감 방안을 찾게 되면서 포스코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되었어요.</p>
<p style="line-height: 150%;">세 번째는 MRO 자재관리 표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제철소 설비들의 정비를 위해 사용되는 정비용 자재 품목들을 UN에서 추천하는 방식으로 표준화를 시켜보니, 종전의 35만 여종으로 분류되던 품목들이 11만 종으로 단순화되었습니다. 이렇게 표준화를 해 놓고 보니 어느 품종은 같은 부품임에도 불구하고 포항, 광양, 선강, 압연 등의 부서에서 서로 다른 5종으로 분류된 예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부품을 구매 가격도 다르게 구매하여 제각각 재고관리를 하고 있었던 거지요.</p>
<p style="line-height: 150%;">그리고 하나 더 얘기하자면 사실 포스코 직원들로부터 가장 칭찬받았던 성과인데, 결산기간을 1일 단위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지요. 그 전까지는 많은 직원들이 약 1 주일 야근을 해도 결산을 할 수 없었는데, 하루 단위로 결산이 되어버리니 업무 부담도 줄고 야근할 일도 없어져서,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것이 진정 포스코가 대학생이 일하고 싶어하는 기업 1위가 된 계기가 아닐까 해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PI는 한번 도입했다고 해서 가만히 두어도 계속적으로 기능하는 영구재가 아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시간의 경과, 경영층의 변화, 대폭적인 조직구성의 개편 등이 일어나면 이전처럼 기능 중심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때 어떤 부문에서 전체적인 프로세스를 무시하고 부분 최적화를 추구하다 보면 PI의 퇴보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분 최적화는 다른 부문의 프로세스 이탈을 부채질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구매, 마케팅, 조업, 정비 등의 각 분야가 따로 놀면서 시스템의 약화를 초래하는 것이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예를 하나 들어 보지요. 포스코의 생산제품 평균 재고가 150만 톤 수준이었습니다. 이게 PI 도입 이후 30만 톤으로 줄었어요. 그런데 생산량의 변화가 없는데도 지금 다시 150만 톤 수준으로 늘어났습니다. 120만 톤 정도가 고객에게 인도되지 못하고 창고에 쌓여 있는 겁니다. 8000억 원 내지 1조 원의 돈이 현장에 묶여 있는 거예요. 이런 게 바로 퇴보입니다. 시스템 자체가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인드가 시스템 중심에서 섹션 중심으로 발전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지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2004년 포항제철소장이 되고 나서도 제철소의 운송출하 기능을 마케팅으로 옮긴 것은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사실 신입사원 시절부터 포항제철소 생산관리부에서 근무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고, 이후 광양제철소 조직 편제에 반영시킨 후 PI 추진 프로젝트를 맡아 전사적인 체제를 굳힌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후에도 줄곧초급 실무자 때부터 지속적으로 키워왔던 문제의식을, PI라는 기회를 만나 전사 임직원들과 함께 사내 모든 자원을 활용하여 해결해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라며 감사히 여겼다.</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2.jpg" alt="6시그마 도전 골든벨에서 문제를 출제하는 류경렬 포항제철소장의 모습" width="650" height="431" /><figcaption>류경렬 포항제철소장이 2004년 11월 9일 포스텍 체육관(사진)과 광양제철중학교 체육관을 연결해 열린 &#8216;6시그마 도전 골든벨&#8217; 에서 문제를 출제하고 있다.</figcaption></figure>
</div>
<h2>품질, 가격, 납기 경쟁력 과인적 우월성으로 글로벌시장 선도하길</h2>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32.jpg" alt="디지털포스코책" width="150" height="226" /><figcaption></figcaption></figure>
</div>
<p>유럽이나 미국의 예와 같이 한국에서도 &#8216;철강업의 사양화&#8217; 이야기가 더러 나오지만, 그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언했다. 미국에서는 철강업 이전에 철강다소비업종이 먼저 사양화의 길을 걸었지만, 한국은 여전히 철강다소비업종이 산업의 주축을 이루고 있고, 중국과의 경쟁에서도 불리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p>
<p>&#8220;우리가 중국에 비해서 가격경쟁력이 떨어진다고들 하는데, 잘 따져보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중국보다 불리한 것은 인건비 하나인데, 철강업의 총 코스트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5% 정도입니다. 이걸 가지고 사양화 운운하는 것은 엄살이에요. 프리미엄 제품뿐만 아니라 일반 제품도 마찬가집니다. 품질, 가격, 납기의 3대 경쟁력은 포스코의 절대 우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적 자원의 우월성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PI를 통해서 우리 포스코인들은 양적성장이 정체된 상태에서 창사 30여년 만에 전면적인 변화를 경험했고, 이를 통해서 회사가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강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당시에 &#8216;디지털 포스코&#8217;라는 책으로도 출판하였으니, 포스코 도서관에서 한번씩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지금 포스코를 짊어진 후배들은 우리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준재들입니다. 아무 걱정 말고 파이팅하시기를 바랍니다.&#8221;</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2/4.jpg" alt="포항제철소 산소공장 제12호기 준공식 모습. 왼쪽부터 설비공급사 에어리퀴드(Air Liquide)사 두칠렛(Ducholet) 부사장, 류경렬 포항제철소장, 포스코건설 고영균 부사장" width="650" height="434" /><figcaption>2005년 5월 31일 포항제철소 산소공장 제12호기 준공식에서 (왼쪽부터) 스위칭을 하고 있는 설비공급사 에어리퀴드(Air Liquide)사 두칠렛(Ducholet) 부사장, 류경렬 포항제철소장, 포스코건설 고영균 부사장.</figcaption></figure>
</div>
<p>우재욱 &lt;시인·작가&gt;<br />
<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5/nam.png" alt="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width="450" height="137" usemap="#imgmap201852142921" /></p>
<map id="imgmap201852142921" name="imgmap201852142921">
<area alt="56편 이후 모아보기" coords="1,84,220,134" shape="rect" href="https://newsroom.posco.com/kr/tag/%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 target="_blank" />
<area alt="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coords="228,83,446,135" shape="rect" href="http://www.posco.co.kr/homepage/docs/kor6/jsp/news/posco/s91fnews002l.jsp?saveText=%B3%B2%B1%E2%B0%ED%BD%CD%C0%BA%C0%CC%BE%DF%B1%E2" target="_blank" /> </map>
</div>
]]></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남기고싶은이야기 93] 배정운 S&#038;M미디어 회장, 포스코냉연 경쟁력의 토대 연합철강에서 놓았다</title>
				<link>https://dev-newsroom.posco.com/kr/%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93-%eb%b0%b0%ec%a0%95%ec%9a%b4-sm%eb%af%b8%eb%94%94%ec%96%b4-%ed%9a%8c%ec%9e%a5-%ed%8f%ac%ec%8a%a4%ec%bd%94%eb%83%89/</link>
				<pubDate>Wed, 10 Jan 2018 00:00:00 +0000</pubDate>
				<dc:creator><![CDATA[posconews]]></dc:creator>
						<category><![CDATA[사람과문화]]></category>
		<category><![CDATA[남기고싶은이야기]]></category>
		<category><![CDATA[배정운 S&M미디어 회장]]></category>
		<category><![CDATA[연합철강]]></category>
		<category><![CDATA[철강금속신문]]></category>
									<description><![CDATA[1997년 들어 한보그룹의 부도로 공중에 떠버린 당진제철소의 실수요자 문제를 두고 포스코와 현대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자못 뜨거웠다. 철강금속신문(당시 한국철강신문, 철강신문)은 이 문제에 대해 포스코에 비중을 두고는 있었지만, 업계를 대변하는 전문지로서 눈에 띄게 어느 한쪽을 거들고]]></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div class="article">
<p>1997년 들어 한보그룹의 부도로 공중에 떠버린 당진제철소의 실수요자 문제를 두고 포스코와 현대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자못 뜨거웠다. 철강금속신문(당시 한국철강신문, 철강신문)은 이 문제에 대해 포스코에 비중을 두고는 있었지만, 업계를 대변하는 전문지로서 눈에 띄게 어느 한쪽을 거들고 나설 수는 없는 입장이어서 중립적인 논조를 지키고 있었다.</p>
<div style="height: auto; border: 1px solid #d5d5d5; padding: 20px;">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left">
<tbody>
<tr>
<td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1/dot5.jpg" alt="따옴표 icon" width="100" height="100" style="margin-right: 10px;" /></td>
</tr>
</tbody>
</table>
<p><b> <span style="color: #3f699d;">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8216;남기고 싶은 이야기&#8217;를 연재합니다.</span> </b></p>
<p><b><span style="color: #3f699d;">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lt;편집실&gt;</span></b></p>
</div>
<p><b>&#8211; 연합철강, 국제상사서 수출업무 맡으며 포스코와 40년 인연<br />
&#8211; 신일철이 일본의철강신문 기사 활용하는 것 보고 철강신문 창간<br />
&#8211; 25년간 독립성 유지하며 철강업계 대변지로서의 사명 견지 </b></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1/732.jpg" alt="배정운 S&amp;M미디어 회장의 모습. 주요 경력 1940 부산 출생 1963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 1967 연합철강공업 수출 부장, 뉴욕지사장, 상무이사, 부사장, 1981 국제상사 철강금속 본부장, 영업담당 부사장 1987년 두양금속, 영흥철강 대표이사 1994년 한국철강신문 대표이사 2004년 S&amp;M미디어 대표이사(現) 상훈 2004 석탄산업훈장(제5회 철의 날)" width="360" height="829" /><figcaption></figcaption></figure>
</div>
<p>1997년 들어 한보그룹의 부도로 공중에 떠버린 당진제철소의 실수요자 문제를 두고 포스코와 현대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자못 뜨거웠다. 철강금속신문(당시 한국철강신문, 철강신문)은 이 문제에 대해 포스코에 비중을 두고는 있었지만, 업계를 대변하는 전문지로서 눈에 띄게 어느 한쪽을 거들고 나설 수는 없는 입장이어서 중립적인 논조를 지키고 있었다. 이에 대해 포스코는 뭔가 마뜩지 않은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p>
<p>현대는 현대자동차의 노관호 부사장을 현대제철(당시 인천제철) 사장으로 포진시켰다. 철강을 잘 몰랐던 노 사장은 이런저런 자료를 살피다가 한국철강신문을 즐겨 보게 되었고, 철강을 공부하는 텍스트로 삼을 정도로 가까이 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철강신문에 현대의 광고가 몇 번 실렸다.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철강금속신문 배정운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p>
<p>&#8220;세상일이란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바라보면 이상하게 보이는 겁니다. 당시 포항제철에서는 철강신문이 자신들을 적극 지원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싶으니 좀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런 중에 현대의 광고가 몇 번 실리니까, 바로 전화를 해온 것이었어요. 포철의 S전무가 우리 신문의 김성덕 전무에게 약간의 항의성 전화를 했는데, 두 사람은 서울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어요.&#8221;</p>
<p>서로 흉허물 없는 사이이기에 말도 스스럼없이 오갔다. S전무가 &#8216;철강신문이 현대를 지원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러느냐&#8217;고 물었고, 김성덕 전무가 &#8216;신문사 입장도 있는 것 아니냐&#8217;고 답한 것까지는 통상적인 대화의 범위였다. 하지만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약간 듣기 거북한 말이 오갔다.</p>
<p>&#8220;우리가 포철 시키는 대로 해야 하나? 우린 포철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8221;</p>
<p>김성덕 전무의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그대로 포철 최고경영층에까지 보고되었다. 김만제 회장은 불쾌한 표정으로 오늘부터 철강신문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지시했다. 이후 포철의 지원은 완전히 끊겼다. 경제적인 문제를 넘어서서, 명색이 철강신문이 국내 철강업계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포철과 갈등 관계에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부자연스런 일이었다.</p>
<p>&#8220;당시 포철 홍보 라인과도 그렇게 우호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보니 답답했습니다. 신문사 내부적으로는 우리 나름의 조치를 취하자는 등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나는 시간이 해결할 문제이니 기다리자면서 말렸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동원할 만한 학연이나 지연이 더러 있었지만, 그런 데는 일절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11개월이 지나 포철 김종진 사장이 보자고 해서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문제가 해결되었어요.&#8221;</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1/01.jpg" alt="포스코개발(현 포스코건설) 창립 기념 리셉션에서 이운형 세아제강 회장, 김만제 회장, 김진주 부사장, 배정운 철강신문 회장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width="650" height="503" /><figcaption>1994년 12월 1일 서울 중구 남산 힐튼호텔에서 열린 포스코개발(현 포스코건설) 창립 기념 리셉션에서 이운형 세아제강 회장, 김만제 회장, 김진주 부사장, 배정운 철강신문 회장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figcaption></figure>
</div>
<p>그는 1963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ROTC 1기로 입대해, 통역장교로 복무하다 1965년3월 전역했다. 집에서는 상대 출신이니 은행 취직을 권했다. 은행 시험이 9월에 있었으므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에, 천양산업 신입사원 모집 광고가 눈에 띄었다. 천양산업에 재직하고 있는 고등학교, 대학 선배에게 의견을 구했더니 괜찮은 회사니 오라고 했다. 은행으로 들어가기까지의 시간이라도 때워보자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p>
<p>&#8220;천양산업은 1965년 당시 수출 실적 2위를 기록하고 있는 무역회사였어요. 인삼 등을 수출하는 농산물과, 오징어 등을 수출하는 수산물과, 흑연·중석·철광석 등을 수출하는 광산물과가 있었습니다. 광산물과로 배치되어 양양철산에서 나오는 철광석을 일본 야하타제철소에 수출하는 업무를 맡았어요. 내가 왜 이 이야기를 다소 장황하게 하느냐 하면 이때 나와 철강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8221;</p>
<p>1967년에는 준공을 목전에 둔 연합철강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해 역시 수출업무를 맡음으로써 철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이듬해에는 6개월 동안 도쿄지사에 근무했고, 1970년에는 국제 입찰을 통해 대만석유공사에 드럼 제작용 냉간압연제품 보디(body)를 수출하기도 했다. 당시 국내 산업에서 연합철강의 위상은 대단했다. 1972년 수출 1위 기업이 됐고, 포항제철소 1기 준공 이듬해인 1974년에는 1억불 수출탑을 받기도 했다.</p>
<p>&#8220;1970년들어 중동 시장이 열렸는데, 정부에서는 지원을 해주면서 중동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유했어요. 그때 마침 연합철강이 이란에 수출을 좀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란지사 한국 1호로 나갔습니다. 이후 1977년 뉴욕 주재 이사로 있을 때, 잘 알다시피 연합철강이 국제상사로 넘어가는 태풍이 불어닥친 거야. 남들이 20년 걸쳐 겪을 일을 나는 몇 년 사이에 다 겪었지. 그해에 포스코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으니 이해를 돕기 위해 그동안의 과정을 간단히 말씀드리는 겁니다.&#8221;</p>
<p>그는 임원도 했으니 회사를 떠나려 했지만, 그의 학·경력을 살펴본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은 그를 상무로 진급시켜 수출, 원료, 자재 업무를 맡겼다. 그는 그때 포스코와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은 후 지금까지 무려 40년 세월 동안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p>
<h2>셀러스 마켓에서 길러진 습관, 포스코 마케팅 능력 취약하게 만들어<br />
포스코의 탄탄한 상공정 덕에 하공정 경쟁력에 많은 도움 받아</h2>
<p>&#8220;연합철강에서 가장 중요한 원재료는 당연히 핫코일이었습니다. 당시 연합철강뿐만 아니라 국내의 냉연업체나 강관업체에서는 핫코일을 일본의 신일철 등에서 수입해 쓰고 있었어요. 매분기 신일철과 연합철강 사이에 가격 협상이 타결되면 일신제강, 부산파이프, 한국강관에서도 그 가격을 적용받았습니다. 당시 일본에 철강신문이 몇 개 있었는데, 신일철에서는 상담 중에 신문을 곧잘 이용했어요, 일본 일간철강신문에 나온 철강재 가격 전망 등의 기사를 들이대는 거야. 당연히 일본에 유리하게 작성된 기사였지.&#8221;</p>
<p>그는 그때 막연하게나마 국내에도 저런 신문이 있으면 참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생각은 후에 그가 한국철강신문을 창간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런 중에 1977년 들어 포스코의 핫코일 일부가 국내 시장에 나왔다. 전량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다가 일부라도 국내 조달이 이루어지니 수요업체에는 큰 힘이 되었다.</p>
<p>&#8220;핫코일 수요가 연합철강이 가장 많았습니다. 국내 수요와 포스코의 국내 공급량을 비교하면 공급이 절대 부족했어요. 일본산과는 상당한 가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수요업체에서는 매분기 포스코에 많은 물량을 신청했지만, 포스코는 신청한 대로 주지 않는 거야. 포스코도 달라는 대로 다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겠지만, 그러한 절대적인 셀러스 마켓(Seller&#8217;s Market)에서 길러진 습관이 결국 포스코의 마케팅 능력을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8221;</p>
<p>그는 당시 국내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포스코의 마케팅은 &#8216;상담이 전혀 없는 할당&#8217;이었다고 했다. 수요업체별로 물량을 할당해 놓고 나서 가격은 일방적으로 &#8216;얼마&#8217;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는 것이다. &#8216;할당&#8217;이라는 말이 성에 차지 않는지, 아예 &#8216;배급&#8217;이었다면서 당시를 떠올렸다. 물론 포스코 내부적으로 국내외 시장 수급,원가 등을 충분히 검토한 후 결정한 것이었지만 말이다.</p>
<p>&#8220;그때 내가 포스코에 출입했습니다. 안병화 판매 담당 상무에, 오종환 판매관리부장이었지요. 그 외에도 오일용, 손근석, 전순효, 박문수, 이런 분들과 얼굴을 맞대고 지냈습니다. 싸우기도 하고 사정도 하면서 아무튼 잘 거쳐 왔지. 과거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8221;</p>
<p>초기에는 연합철강 현장에서 포스코가 공급하는 핫코일에 거부감을 보였다. 엔지니어들은 속성적으로 원재료의 교체를 싫어하지만, 일본산에 비해 품질이 한참 떨어지는 포스코의 제품은 그들에게 그 이상의 거부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는 전량 포스코 제품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현장의 저항을 다독였다. 이후 포스코 제품은 매우 빠른 속도로 품질이 안정되어 갔다.</p>
<p>&#8220;가격이 일정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달랐습니다. 연합은 수출을 많이 하는데, 핫코일이 비싸면 해외 시장에서 경쟁할 수가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더니, 포스코에서 로컬가(local價)라는 제도를 만들어 수요업체를 지원해 주었어요. 수출용 원자재에 적용하는 가격이었지. 연합에서는 냉연제품을 두고 포스코와 경쟁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표면처리 쪽으로 방향을 틀기도 했습니다. 컬러강판, 전기아연도금강판 등이 그래서 개발된 것이었어요. 당시 수요업체에서 볼멘소리로 포스코를 &#8216;갑 중의 갑&#8217;이라고들 했고, 그런 지적에 일리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업스트림(상공정)에서 탄탄한 경쟁력을 갖춘 포스코가 있었기 때문에 다운스트림(하공정)인 전문 냉연업체,강관업체 등에서 많은 혜택을 본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8221;</p>
<h2>1985년 연합철강 공중 분해··· 포스코 출신으로 경영정상화팀 꾸려<br />
16개 철강사, 2개법인 각 1구좌, 개인출자로 철강신문 자본금 마련</h2>
<p>1980년에는 연합철강을 떠나 그룹 내의 국제상사 철강사업본부장으로 갔다. 제조업에서 유통업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철강은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국제상사는 수출 실적 4위를 기록하고 있었지만, 철강사업부에서는 연합철강의 물량만을 취급하고 있었으므로, 포스코의 물량은 삼성, 대우, 쌍용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동안 포스코와 거래하면서 친분을 쌓아온 그에게 포스코 물량 확보라는 미션을 맡긴 것이었다.</p>
<p>&#8220;같은 포스코지만 내수판매와 수출이 부 단위로 나누어져 있었으므로, 내가 거래하던 판매부와는 다른 수출부를 새로이 뚫어야 했어요. 그때 포스코 수출부에는 이선구 부장, 이구택 차장이 있었는데, 인간적으로는 따뜻하게 대해 주었지만, 특별히 국제상사를 봐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기존의 상사들이 너무나 막강하게 포지셔닝되어 있었기 때문이지. 포스코의 배려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물량을 늘려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국제그룹이 그만 공중분해되고 만 거야. 1985년 2월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지. 국제그룹 회장이 폭설로 인해 청와대 모임에 늦게 간 것 등이 문제가 되어 정치적인 파산 선고를 당했지. 정말 웃지 못할 일이었습니다.&#8221;</p>
<p>공중분해 당시 그는 국제상사의 영업 총괄 부사장이었다. 이제 직장생활은 끝이다 했는데, 연합철강을 인수한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이 그에게 연합철강의 수출 인력을 확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연합철강의 수출 조직망은 상당히 막강한 인력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인선 작업을 마치고 나니 장 회장은 &#8216;졸병만 보내고 대장이 안 오면 어떡하느냐&#8217;며 그에게 연합철강 부사장을 강권했다.</p>
<p>&#8220;1986년 3월 24시간 철야로 개최된 첫 주주총회에서부터 대주주 간에 감정이 격화되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회사가 동국, 반동국(反東國)으로 나뉘어 상호 반목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어요. 보다 못한 정부에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1986년 8월 포스코 인맥으로 구성된 경영정상화팀을 꾸려 보냈습니다. 그때 고준식 사장을 비롯해서 박종태, 신창식, 김진주 이런분들이 오셨어요. 나는 그때 골치가 아파서 회사를 그만두는 것을 전제로 뉴욕에 가 있었습니다.&#8221;</p>
<p>사태가 진정된 뒤 돌아와 한동안 철강 제조업체(두양금속,영흥철강)를 거쳐 철강 무역 등의 일을 하다가 문득 연합철강 재직 시 신일본제철과 핫코일 가격 협상을 할 때 그들이 곧잘 활용하던 &#8216;일간철강신문&#8217;이 떠올랐다. 돈은 없지만 인적 네트워크는 살아있으니, 추진해볼 만한 일로 생각되었다. 문제는 상업적 가능성이었다. 아무리 유용한 일이라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p>
<p>몇 군데 알아보니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8216;당신 같은 경력의 소유자는 백전백패&#8217;라는 진단이었다. 그런 일은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해본 사람이 발행인이 되어 직접 발로 뛰면서 취재도 하고 기사도 쓰는 식으로 꾸려가야지, 경영 마인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당시 전문신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장애물이었다.</p>
<p>&#8220;최청림이라는 친구에게 의견을 구했더니 절대 하지 말라는 거였어요.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으로 나와는 막역한 사이였는데,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다 팔아먹을 생각이면 하라는 거야. 그런데 한국일보 경제부장을 거쳐 사장까지 지낸 박병윤이라는 친구는 조금 달랐습니다. 일본에서는 전문신문이 상당히 잘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잘만 하면 될 수 있을 거라면서 한번 해보라고 했습니다. 조언을 들은 참에 연합철강 기획실에 사업계획서 작성을 부탁해서 창간 작업에 나섰어요.&#8221;</p>
<p>머릿속이 상당히 복잡했다. 과거 박태준 한국철강협회장이 1년에 몇 억 원씩 주고 공업신문의 2개 지면을 사서 철강, 금속 전문 지면으로 활용해 봤지만, 겨우 2년 하다가 실패했던 사실도 떠올랐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단순한 신문이 아닌 업계의 대변지, 정보지, 교류의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p>
<p>&#8220;그러기 위해서는 특정 개인이 아닌 철강업계가 함께 나서서 일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업계 CEO를 두루 만나 사업 설명을 했습니다. 언론계와 산업계의 만남이 아니라 같은 철강업계 인사로서의 만남이었어요. 특히 업계 원로이신 포스코 황경노 회장과 전계묵 전 상공부 차관보의 격려 등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결국 16개 철강사에서 각 1구좌씩, 그 외 개인적인 친분으로 협조해준 2개 법인에서 각 1구좌씩, 총 18개 법인에서 3억 5000만 원, 나머지는 내가 출연해서 모두 7억 5000만 원의 자본금이 형성되었어요.&#8221;</p>
<p>그는 업계에 부담이 되는 기사는 싣지 않는다고 했다. 안병화 포스코동우회장은 만날 때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8216;신문은 가끔 긁어야 해. 그러니 피 안 나올 정도로 긁어.&#8217;라고 했지만, 업계의 대변지로서의 사명을 여일하게 견지해 왔다. 이후 포스코를 비롯한 업계의 적당한 지원으로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고 20년 이상 끌어왔다.</p>
<p>&#8220;포스코의 냉연 조업을 개척한 사람은 연합철강 출신이었습니다. 포스코의 초대 냉연부장 신계연씨가 당사자입니다. 포스코가 내년이면 창립 50주년이 되니 우리나라 철강업도 꽤 연륜이 쌓였어요. 포스코의 원로들을 만나보면 한보를 현대에서 가져간 것이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는 잘 된 일이라고 하더군요. 제철소의 원가경쟁력은 원천적으로 상당한 부분이 건설단가에서 나오는데, 포스코는 정부 지원에 힘입은 바 컸고, 현대 또한 아주 헐값에 인수했으니, 두 제철소가 국제경쟁력을 상당 기간 유지할 것으로 봅니다.&#8221;</p>
<h2>현대와의 경쟁체제, 포스코 마케팅 경쟁력 향상에 좋은 영향 미쳐<br />
여러 번의 산업구조 재편 속 일본을 튼튼하게 받쳐준 힘 철강업에<br />
후배들에게 감사, 無욕심, 건강관리, 인간관계의 중요성 당부</h2>
<p>그는 포스코가 근래에 와서 마케팅 등에서 많이 개선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현대와의 경쟁 체제가 가져다 준 효과일 것으로 진단했다. 현대의 마케팅은 그야말로 무섭다는 것이다. 포스코가 소극, 수동, 방어적이라면 현대는 적극, 능동, 공격적이라는 말에는 포스코에 대한 질책 같은 느낌이 전해졌다. 홍보, 기획, 재정 분야에서 외부 매체를 이용하는 현대의 능력은 자못 탁월하다는 것이다.</p>
<p>&#8220;현대는 우리 철강금속신문뿐만 아니라, 일간지나 경제지는 물론 인터넷 신문까지도 용도에 맞게 잘 이용해요. 철근, 형강과 관련해 건축법을 개정해야겠다고 판단했을 때나,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도 매체를 곧잘 이용합니다. 물론 포스코가 현대와 똑같은 식으로 하지 않고 세계적인 위상을 굳힌 선발 업체로서 금도(襟度)를 지키는 부분이 있기는 할 것으로 봅니다.&#8221;</p>
<p>현재 한국은 인당 철강소비량이 1톤을 넘어섰지만,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인 중국과 인도의 소비량은 매우 보잘것없으므로 철강업의 성장 여력은 크다고 진단했다. 1974년 7억 톤이었던 전 세계 조강 생산량이 현재 16억 톤으로 늘어났으니, 앞으로 중국이나 인도의 인당 소비량이 1톤에 다다르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철강업의 사양산업 논쟁은 그 나라의 정치, 사회, 노동, 환경 등의 구조적인 여건과 관련된 문제이지 철강업 자체의 경제성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p>
<p>&#8220;만약 한국의 철강업이 경쟁력을 잃으면 한국의 산업 전반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산업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건설, 조선, 기계, 자동차, 가전 등이 모두 철강다소비산업인데, 그런 분야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동안 산업구조의 재편을 여러 번 겪어온 일본을 튼튼하게 받쳐준 힘은 철강업에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8221;</p>
<p>친구들 사이에서 서울상대 금속과를 나왔다는 농담을 듣는 그는 우연한 기회에 철강업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지만, 현재 세계 최고의 지위를 점하고 있는 한국 철강업과 함께 지내온 삶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 말에는 삶에 대한 자긍심이 묻어났다.</p>
<p>&#8220;직원들에게 가끔 몇 가지 당부를 합니다. 감사하게 생각하라. 욕심 부리지 마라. 건강 잘 챙겨라.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라.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이건 먼저 세상을 살아온 선배의 지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은 선배들의 지혜보다는 청장년층의 꿈과 야망에서 나옵니다. 장로층(長老層)에서 나보다 젊은이가 더 낫다는 생각을 가지면 세대차도 넉넉히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우재욱 &lt;시인·작가&gt;</p>
<div class="o_imgset">
<figure><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1/02.jpg" alt="고 이운형 세아제강 회장, 홍영철 고려제강 회장, 배정운 회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박건치 철강협회 부회장, 이구택 포스코 회장의 모습" width="650" height="431" /><figcaption>철강업계 인사들과 한자리에 선 배정운 철강신문 회장. (왼쪽부터) 고 이운형 세아제강 회장, 홍영철 고려제강 회장, 배정운 회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박건치 철강협회 부회장, 이구택 포스코 회장.</figcaption></figure>
</div>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5/nam.png" alt="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width="450" height="137" usemap="#imgmap201852142921" /></p>
<map id="imgmap201852142921" name="imgmap201852142921">
<area alt="56편 이후 모아보기" coords="1,84,220,134" shape="rect" href="https://newsroom.posco.com/kr/tag/%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 target="_blank" />
<area alt="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coords="228,83,446,135" shape="rect" href="http://www.posco.co.kr/homepage/docs/kor6/jsp/news/posco/s91fnews002l.jsp?saveText=%B3%B2%B1%E2%B0%ED%BD%CD%C0%BA%C0%CC%BE%DF%B1%E2" target="_blank" /> </map>
</div>
]]></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남기고싶은이야기 92] 김진주 前 부사장, &#8220;당당하고 소신있게 일하고, 지위고하 막론하고 직언했다&#8221;</title>
				<link>https://dev-newsroom.posco.com/kr/%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92-%ea%b9%80%ec%a7%84%ec%a3%bc-%e5%89%8d-%eb%b6%80%ec%82%ac%ec%9e%a5-%eb%8b%b9%eb%8b%b9%ed%95%98%ea%b3%a0-%ec%86%8c/</link>
				<pubDate>Thu, 28 Dec 2017 00:00:00 +0000</pubDate>
				<dc:creator><![CDATA[posconews]]></dc:creator>
						<category><![CDATA[사람과문화]]></category>
		<category><![CDATA[남기고싶은이야기]]></category>
									<description><![CDATA[1975년 3월 김종필 국무총리 주재로 제2제철 관련회의가 열렸다.이 회의에는 관련부처 장·차관, 태완선 한국종합제철 사장, 포항제철 고준식 부사장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8216;한국종합제철&#8217;이름으로 추진하던 제2제철 건설계획은 백지화하여 포항제철에]]></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div class="article">
<p>1975년 3월 김종필 국무총리 주재로 제2제철 관련회의가 열렸다.이 회의에는 관련부처 장·차관, 태완선 한국종합제철 사장, 포항제철 고준식 부사장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8216;한국종합제철&#8217;이름으로 추진하던 제2제철 건설계획은 백지화하여 포항제철에 흡수합병시키고, 제2제철 건설은 포항제철의 3기 건설이 끝나는 1978년 이후 포항제철 제2공장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p>
<div style="height: auto; border: 1px solid #d5d5d5; padding: 20px;">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left">
<tbody>
<tr>
<td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12/dot5.jpg" alt="따옴표 icon" width="100" height="100" style="margin-right: 10px;" /></td>
</tr>
</tbody>
</table>
<p><b> <span style="color: #3f699d;">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8216;남기고 싶은 이야기&#8217;를 연재합니다.</span> </b></p>
<p><b><span style="color: #3f699d;">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lt;편집실&gt;</span></b></p>
</div>
<p>&nbsp;</p>
<p><b>&#8211; 포항 2~4기, 광양 1~4기 건설 기획에 참여한 기획通<br />
&#8211; &#8216;공장화&#8217; 아닌 &#8216;기업화&#8217;에 힘써야 성장기업으로 존속 가능</b></p>
<p>&nbsp;</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left">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12/9292922.jpg" alt="김진주 전 부사장 주요 경력 1941 서울 출생 1966 서울대 상과대학 졸업 1973 포스코 입사 기획실 종합기획과, 경영정책실 경영조사과장, 경여조사그룹 차장, 경영정책실 경영기획그룹 차장, 냉연판매부장, 경영정책실 부장, 부소장 1986 연합철강, 한국중공업 위탁경영 참여 1988 포항도금강판 부사장 포스콘 부사장 1992 포스코 특수석판 사장 1993 포스코 전무이사(판매,자금담당) 부사장(판매,재무담당) 기획조정실장(부사장)" width="360" height="935"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10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body>
</table>
<p>1975년 3월 김종필 국무총리 주재로 제2제철 관련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관련부처 장·차관, 태완선 한국종합제철 사장, 포항제철 고준식 부사장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8216;한국종합제철&#8217;이름으로 추진하던 제2제철 건설계획은 백지화하여 포항제철에 흡수합병시키고, 제2제철 건설은 포항제철의 3기 건설이 끝나는 1978년 이후 포항제철 제2공장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p>
<p style="line-height: 150%;">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제2제철 논의에 다시 불이 붙은 것은 그로부터 2년 뒤 1977년이었다. 제1차 오일쇼크의 충격이 의외로 빠르게 진정되면서 정부는 다시 제2종합제철을 추진하기로 했다. 제2제철 건설을 정부 주도로 할 것이냐, 민간 주도로 할 것이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을 때 현대그룹이 먼저 나서 민간주도가 합당하고 자기네가 적임자라고 발표했다. 당시의 상황을 김진주 전 부사장은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8216;제2제철설명단&#8217;에서 실수요자 포항제철 당위성 논리 개발</span></b></p>
<p style="line-height: 150%;">&#8220;당시 포항제철은 포항 3, 4기 건설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제2제철은 포항제철 제2공장으로 건설한다는 한국종합제철 흡수합병 방침에 따라 사전<br />
준비 작업을 진행해왔어요. 그러나 중동건설 특수로 충분한 자금을 축적한 현대는 정문도 전 제2종합제철 사장을 영입해 매우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제2제철 건설에 그 어떤 정부의 지원도 받지 않고, 오직 자체 자금만으로 건설하겠다는 자금 조달 면에서의 장점을 내세웠어요. 정부의 관련부처도 항만, 철도, 용수, 전기,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성격의 사업까지 모두 자체 자금으로 추진하겠다는 현대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포항제철은 1978년 6월 12일 정부에 제2공장(포항제철은 제2제철을 &#8216;제2공장&#8217; 이라 불렀다.) 건설 의사를 밝히고 &#8216;제2공장 제1기 사업계획서&#8217;를 정부에 제출했다. 계획서에는 포항제철소의 조업과 건설과정에서 축적한 기술력 우위, 차관선과의 긴밀한 유대 활용, 원료 도입원의 용이한 확보, 일부 시설 중복투자 배제를 통한 설비투자비 절감, 1사 2공장의 장점을 최대로 활용한 국제경쟁력 확보 등의 이유를 들어 제2공장 실수요자는 포항제철이 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명했다. 현대는 6월 22일 인천제철을 인수하고 8월 18일 &#8216;제2종합제철 1기 사업계획서&#8217;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로써 이른바 &#8216;제2제철의 국·민영화 논쟁&#8217;이 촉발됐다.</p>
<p style="line-height: 150%;">현대는 정부 부담이 전혀 없는 순수 민간 자본으로 추진한다는 점, 건설회사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저렴하게 건설할 수 있다는 점, 아산에 이미 소요 부지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 등을 내세웠다. 포항제철은 일관제철소 건설과 조업 경험, 축적한 인력과 기술을 부각했다. 주무부서인 상공부, 승인부서인 경제기획원의 입장은, 정부에는 철강산업에 더 이상 지원할 자금이 없는데다가 투자에 따른 고용효과가 낮기 때문에, 현대가 실수요자가 되는 것이 국가 차원에서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했다. 더욱이 대정부 로비는 현대가 포항제철보다 월등하여 현대는, 아예&#8217;아산제철소&#8217;라는 이름까지 지어서 강력하게 밀어붙였다.</p>
<p style="line-height: 150%;">당시 박태준 사장의 명에 따라 서울에 &#8216;제2제철설명단&#8217;이 만들어졌다. 단장은 안병화 부사장이 맡았고, 단원으로는 여상환씨, 박준민씨, 김진주 전 부사장이 참여해 대정부 설명을 담당했다.</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건설·조업경험, 해외 차관 도입 우위 강조해 제2제철 실수요자 낙점</span></b></p>
<p style="line-height: 150%;">설명단은 정부 관련부처와 인사를 대상으로 포항제철이 실수요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며 설명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으며 심지어 설명을 듣는 것마저 회피하는 분위기였다.</p>
<p style="line-height: 150%;">정부 대상 설명이 끝나가는 시점에, 박태준 사장은 제2제철설명단에 두가지 지시를 내렸다. 하나는 제2제철 실수요자 결정에는 최종적으로 대통령의 재가가 나야 하니 대통령 면담을 신청하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대통령 보고 시에 포항제철이 하는 것이 국민경제발전에 꼭 필요하다는 자료를 만들라는 것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건설경험, 조업기술, 국제경쟁력의 등의 건설이나 조업에 관련된 사안이 문제가 아니라, 예산이 부족해도 국가가 포항제철을 지원하는 것이 정부로서 올바른 선택임을 증명하는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당시에 우리나라의 경제발전과 이에 따른 산업구조의 장기적 발전전망을 보니,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되는 2000년경에는 자동차, 건설, 조선, 가전, 철강산업 등이 중심이 되는 중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로 변하는 것으로 조사됐어요. 이 모든 산업부문을 현대라는 1개의 기업이 독점하게 되면, 우리나라 기간산업의 집중이 극심해지고 산업구조의 왜곡을 불러올 수 있었어요. 더구나 산업발달의 기초소재인 철강재까지 1개의 기업이 독점을 하면 타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부실화될 경우 국민경제 전체에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선진국가가 발전도상에 있을 때나 선진국이 되어있는 당시에도 철강산업만은 국가가 정책적으로 직간접으로 관리하는 산업구조로 되어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나의 개인기업에 산업구조가 편중되고 경제생산력의 과도한 의존은 국민경제 발전에 역행한다는 의미의 내용을 담아 자료를 만들어 드렸어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제2제철 실수요자 문제는 박태준 사장의 주장을 받아들인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에 맡기기로 결단하면서 막을 내렸다. 정부는 1978년 10월 27일 제2제철 실수요자를 포항제철로 확정하고, 10월 30일 이 사실을 발표했다.</p>
<p style="line-height: 150%;">이후, 1979년 6월 아산만으로 입지가 선정되었으나, 포항제철은 항만과 용수 등의 사회간접자본 부분이 열악하여 다른 대안을 찾고 있었다. 그 해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서거한 후 1980년 9월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했다. 이듬해 11월 박태준 회장, 고준식 사장 체제에서 다시 광양만으로 최종 확정되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그동안 한번도 거론된 적이 없던 광양만이 새로 제2공장 입지로 부상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1981년 어느 날이었어요. 박태준 회장비서실에서 당시 황경노 동부그룹 부회장을 모시고 창원에 있는 한국중공업(現 두산중공업)에 가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1년전인 1980년쯤 박 회장의 지시로 적자가 계속된 한국중공업을 포항제철이 인수하는 작업을 비밀리에 한적이 있어서 그것과 관련된 사항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박 회장이 대우중공업 헬기로 한국중공업에 오셔서 회사 현황 보고를 받으시고, 대기하고 있던 황경노 전 회장과 나를 헬기에 타라고 하셨어요. 헬기가 남해안을 끼고 비행해 섬진강 하구에 다다르자 박 회장은 지금 광양제철소가 들어서 있는 광양만 일대를 가리키며 &#8216;저기가 제2제철 입지&#8217;라고 하셨어요. 박태준 회장의 마음 속에 있던 새로운 제철소 입지가 밖으로 드러나는 최초의 순간이었습니다. 이곳을 추천한 사람은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이맹기 전 대한해운 사장이라고 했어요. 아산만이 제철소 입지로서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고심하고 있을 때 이맹기 제독이 &#8216;제가 알고 있는 좋은 곳이 있습니다&#8217;하면서 광양만을 지목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8216;아! 광양이 새로운 제철의 중심지가 되는구나&#8217;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냉연제품 공급해주라는 회장 지시에도 끝까지 소신 지켜</span></b></p>
<p style="line-height: 150%;">김진주 전 부사장은 1982년 11월 냉연판매부장으로 보임되었다. 당시 냉연제품은 연합철강, 일신제강 등 기존의 철강회사들과 경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자동차는 현대에서 처음으로 &#8216;포니&#8217;라는 이름의 소형차를 생산하고 있었고, 가전제품도 수입에 의존하는 등 냉연제품의 수요가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장에서 나오는 여러 부산물도 냉연판매부에서 판매하던 시기였다. 냉연제품 판매가 매우 부진하여 냉연공장만이 적자를 내고 있었다. 어떻게든 시장을 개척하라는 특명이 그에게 내려졌다. 몇 개의 대리점이 부도를 냈고, 몇 개의 대리점은 부도가 날 위험이 있었다.</p>
<p style="line-height: 150%;">외상판매에 따른 보증을 위한 담보율 등을 원리원칙에 입각해 처리하다 보니 김진주 전 부사장은 현실감각이 없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p>
<p style="line-height: 150%;">부장으로서 1년이 지날 무렵 발생한 1979년 2차 석유파동에서 벗어나면서 판매량도 늘어나고 수요시장이 정상을 찾아가던 어느날, 젊은 사람이 찾아와서 &#8220;방금 박태준 회장과 함께 점심 식사하고 왔다&#8221;며 박 회장이 직접 쓴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8216;김진주 부장 앞&#8217;으로 되어있는 메모지에는 불황에는 남아돌고 호황에는 품귀를 빚고 있는 제품의 거래물량을 몇 퍼센트 늘려주라는 내용이었다. 김진주 부장은 그 자리에서 그 메모지를 찢어버리고 당장 거래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다음날 박태준 회장이 그를 불렀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야, 네가 회장이냐, 내가 회장이냐?&#8221;</p>
<p style="line-height: 150%;">&#8220;제가 왜 회장입니까? 저는 부장입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8220;회장이 그런 지시도 못하냐?&#8221;</p>
<p style="line-height: 150%;">&#8220;그건 안됩니다. 제가 판매책임자로서 안 팔리는 제품은 끼워팔거나, 불황시에 안 팔리는 제품은 불황시 판매한 비율로 호황시에 물량을 주겠다는 약속을하고 판매를 합니다. 불황시에는 안사가고 호황시에 학연·지연·혈연이나 정관계 인맥을 동원해 청탁이 들어온 업체에 물량을 주게 되면 제가 판매부장으로서 판매를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여러수요가 가 온갖 인맥을 다동원해 물량을 더 받기 위하여 회장님에게 간다면, 판매하는 저도 어렵고 결국에는 그여파로 인해 회장님에게도 나쁜여론이 생길 수 있으니 회장님의 지시를 따를 수 없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시겠다면 회장님께서 판매부장을 하시는걸로 알고 저는 물러가겠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그 다음날 그는 본사 대기발령을 받았다.</p>
<p style="line-height: 150%;">그리고 얼마 후 감사실조사역, 다음에 경영정책실장이 되었다.</p>
<p style="line-height: 150%;">그는 1986년 무렵, 은퇴 후 포항제철 고문으로 계시던 고준식 전 사장을 모시고 연합철강경영정상화에 나섰다. 5공화국이 출범한 뒤 전두환 대통령이 재계의 골칫거리였던 연합철강의처리문제를 국회재무분과 위원장이었던 박태준 회장에게 부탁한데 따른 조치였다. 당시 연합철강은 창업자인 권철현씨와 정치적으로 인수한 동국제강 장상태씨 간의 경영권싸움과 이로 인한 계속된 파업으로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운 상태였다.</p>
<p style="line-height: 150%;">서울본사에는 고준식 사장, 이영부 사장과 김진주씨, 부산공장에는 박종태 부 사장과 신창식 전무가 근무하면서 1년간의 노력으로 연합철강경영을 정상화시켰다. 그 뒤 인사발령을 받고 포철로 복귀하는중에 다시 1987년 한국중공업위탁경영인으로 선정된 안병화전사장을 따라 한국중공업으로갔다. 당시 한국중공업은 원자력발전소 건설 주도권을 놓고 한국전력과 싸우던 끝에 사장이 사임하는등 경영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김 전 부사장은 안병화 사장을 도와 한국중공업 경영을 본궤도에 올려 놓는 데 크게 기여했다. 포항제철과 한국중공업에서 각각 사장으로 재임한 안병화 사장은 노태우 대통령 취임 이후 초대 상공부 장관을 거쳐 한국전력 사장을 역임했다.</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8216;한보철강 인수 실패&#8217;, &#8216;신세기통신 매각&#8217; 매우 안타까워</span></b></p>
<p style="line-height: 150%;">1997년, 그동안 위태위태한 상황을 보이던 한보철강이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당시 철강업계에서 일어난 문제의 뒤처리는 응당 포스코 몫이었다. 포스코가 파견한 위탁경영팀의 조사에 의하면 한보철강의 투자비는 회계상 약 5조 원이었으며,<br />
실질가치는 1조 9000억 원 정도였다.</p>
<p style="line-height: 150%;">포항제철소의 고로에 해당하는 코렉스(COREX)설비를 살리고, 압연설비 일부를 보완하여 가동하고, 생산 제품은 포스코 계열사인 포스틸에 판매를 위탁하는 방식으로 경영하였다. 포스코는 유상부 회장 취임 이후 한보철강 위탁경영팀을 철수시켰다. 이후 재력가 권철현씨 측에서(전 연합철강 창업자) 일본 자본과 합작해 한보철강을 인수했지만, 가동할 능력이 없어 포기하고 포스코에 매각하려고 하였으나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 뒤 철강 경기가 좋아지면서 채권단에서 한보철강 매각 절차를 밟았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포스코가 한보철강 위탁경영을 계속하든지, 기회가 왔을 때 빨리 매입하든지, 아니면 입찰에서 이길 수도 있었는데, 여러 번 기회를 놓치더니 결국은 현대에 한보철강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땅값만도 1조 원이 넘는 큰 덩어리였는데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포스코가 국내외에서 철강시장지배력을 상실하는 순간이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김진주 전 부사장은 이 문제를 시장지배력(Market Power)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흔히 독과점 문제를 들먹이지만, 철강산업이란 특성적으로 기업 간의 경쟁이 아닌 국가 간의 경쟁을 통해 성장하거나 도태하는 산업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럽에서 시작한 철강산업이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오고, 다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와서 포스코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철강산업의 추이, 특히 시장원리에 의하여 회사간의 신설과 통합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직 철강산업이 자기가 소유한 생산공장에 의존하며 그것이 경영이라고 착각하는 인식에서 그러한 결정 즉 한보철강을 경쟁사에 넘기는 결정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은 그러한 인식이 바탕이 돼 오늘날 세계 철강시장 지배력을 중국에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였다.</p>
<p style="line-height: 150%;">김진주 전 부사장은 신세기통신에 대해서도 진한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신세기통신은 박태준 회장 때 시작하여 정명식 회장을 거쳐 김만제 회장이 완결을 지은 포스코 미래에 가장 희망 있는 전략사업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이동통신은 포스코가 보유한 자금력과 기술력을 총동원하여 정치적으로 2대에 걸친 대통령이 관련된 통신사업자들을 물리치고 새로운 통신사업의 실수요자로 선정된 포스코의 제2 도약을 확보한 사업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당시 신세기통신이 채용한 CDMA 기술은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최첨단 기술로서 그때까지 세계적으로 유일한 기술이었습니다. 포스코의 자금력을 가지고 성장시켰으면 지금의 스마트폰으로 촉발된 통신시장에서 포스코가 주역이 되었을 거예요. 매각 당시 자금부족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반드시 무엇을 매각해야 할 특별히 포기해야 할 이유도 없이 신세기통신 대주주권 16.6%를 2000년 1월 3일 SK텔레콤에 1조 8000억 원에 매각한 것은 대단히 아쉽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외부인사 김만제 회장 취임··· 권한위임·파격적 복리후생제 시행</span></b></p>
<p style="line-height: 150%;">김진주 전 부사장은 김만제 회장 취임과 그의 경영철학 그리고 포스코의 변화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말을 이어갔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김만제 회장은 본인이 스스로 원하여 포스코에 온 것이 아니에요. 김 회장이 포스코에 온배경에는 대통령 후보지명과 선거 기간 중에 일어난 박태준 회장과 김영삼 대표(대통령 후보) 간의 경쟁과 감정대립이 있었습니다. 박 회장이 일본으로 외유를 나간 이후, 후임으로 경영을 맡은 정명식 회장과 조말수 사장 사이에 발생한 잡음에 대해김영삼 정부가 책임을 물은 결과로 김 회장이 오게 된 것입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8220;김만제 회장은 회사의 현황을 잘 알고 있는 사장, 부사장들의 의견을 모아서 의사를 결정하는 &#8216;경영위원회&#8217;를 통해 중요사항을 협의했습니다. 퇴직한 회장, 사장 등 전임 임원들과의 정기적인 회의 제도를 만들어 회사경영에 자문을 받아 결정하였습니다. 자신의 권한을 사장과 부사장, 제철소장에게 대폭 위임했어요. 임직원의 숙원이었던 임금을 인상하고 휴가제를 실시해<br />
파격적인 복리후생 정책을 시행했어요.&#8221;</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center">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12/a018.jpg" alt="김만제 회장을 비롯한 경영위원들이 1995년 무렵 포스코를 방문한 박재윤 통상산업부 장관에게 회사 현황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 width="450" height="453"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r>
<td style="padding: 5;" align="center" width="450">
<p align="left"><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김만제 회장을 비롯한 경영위원들이 1995년 무렵 포스코를 방문한 박재윤 통상산업부 장관에게 회사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용운, 이춘호, 김진주, 이동춘, 김종진 사장, 김만제 회장, 홍상복, 이형팔, 이구택, 김권식, 심재강, 조관행, 미상, 박재윤 장관, 미상.</p>
</td>
</tr>
</tbody>
</table>
<p>&nbsp;</p>
<p style="line-height: 150%;">&#8220;1994년 우리나라의 경제가 특히 금융시장이 나빠지고 있어서, 외화자금 부족을 예상하여 포스코 주식을 미국 뉴욕증시와 런던증시에 상장하고 해외에 낮은 금리의 사채와 차관을 도입하여 35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확보했어요. 국내에서는 제2, 3금융권이 어려워질 것과 그 후유증에 대비하여 거래를 최소화함으로써 IMF 관리체제에서도 제2, 3금융권의 부도와 도산에도 일체의 손실이 없었어요. 충분한 외화와 유동자금의 보유로 건전한 재무구조를 갖췄으며, 그 결과로 국가적으로 문제가 된 삼미특수강을 인수하고 한보철강 위탁경영에도 참여했어요.&#8221;</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center">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12/a027.jpg" alt=" 1994년 10월 14일 포항제철이 국내기업 최초로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3억 달러규모의 주식예탁증서를 상장했다. 뉴욕 증시 상장을 총괄했던 김진주 부사장(왼쪽 두 번째)과 실무진들." width="450" height="225"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r>
<td style="padding: 5;" align="center" width="450">
<p align="left"><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1994년 10월 14일 포항제철이 국내기업 최초로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3억 달러규모의 주식예탁증서를 상장했다. 뉴욕 증시 상장을 총괄했던 김진주 부사장(왼쪽 두 번째)과 실무진들.</p>
</td>
</tr>
</tbody>
</table>
<p>&nbsp;</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한 직원이 대우받는 문화 만들어야</span></b></p>
<p style="line-height: 150%;">김영삼 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도 포스코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당시 일부 임원들이 새 경영층을 찾아가는 등 나름 살 길을 찾았다.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가 일어나면 흔히 새로운 경영진과 실세들이 입성하는 듯한 분위기가 연출되면서, 새로운 비전과 경영목표를 제시하고 과거와의 단절에 나서는데 이는 필요악이기도 하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8216;새 술은 새 부대에&#8217;라는 속담처럼 체제가 바뀌면 분위기 일신 차원에서 대규모 인사를 단행하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그러나 이 작업이 기존 체제에서 일한 사람을 단죄하는 것처럼 진행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더욱이 자기 자신과 철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임직원을 면직하거나 혹은 퇴직시키는 독선적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저의 지론이기도 합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1998년 초, 그는 대검 중수부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김만제 회장 체제에서 판매, 자금, 기획조정실장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임직원의 봉급을 너무 많이 올려 주었다는 것이 이유였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복리후생, 교육, 해외출장 등에 과대한 비용을 썼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8220;삼미특수강 인수와 관련해 돈을 받았다. 300억 원을 어디에 갔다 줬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이런 이유로 자신이 몸담았던 회사가 자신을 대검찰청 중수부에 고발하였다. 신문에는 &#8216;포스코 김진주 부사장 곧 구속될 듯&#8217;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검찰도 출처 불명의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번 조사와 고발이 자기를 통해 김만제 회장에게 책임 지우겠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먼저 검찰에 자신의 뜻부터 전했다고 했다.</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center">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12/a031.jpg" alt=" 1997년 9월 12일 포스코센터 앞 광장에서 열린 프랑크 스텔라 作 아마벨(AMABEL)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레너드 홀슈(Lenhard J. Holschuh) 국제철강협회(IISI) 사무총장, 심재강 전무, 김광준 전무, 박종일 전무, 프랑크 스텔라(Frank Stella) 부부, 김진주 부사장, 이춘호 부사장, 김용운 부사장, 윤석만 상무." width="450" height="464"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r>
<td style="padding: 5;" align="center" width="450">
<p align="left"><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1997년 9월 12일 포스코센터 앞 광장에서 열린 프랑크 스텔라 作 아마벨(AMABEL)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레너드 홀슈(Lenhard J. Holschuh) 국제철강협회(IISI) 사무총장, 심재강 전무, 김광준 전무, 박종일 전무, 프랑크 스텔라(Frank Stella) 부부, 김진주 부사장, 이춘호 부사장, 김용운 부사장, 윤석만 상무.</p>
</td>
</tr>
</tbody>
</table>
<p style="line-height: 150%;">&#8220;나는 네 살 때 일까지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재직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창피해서 못하겠다. 그러니 한 일은 &#8216;했다&#8217;, 안 한 일은 &#8216;안 했다&#8217;고 말한다. 다만 아랫사람이 한 일은 내가 한 거다. 내가 무심코 한 말일지라도 아랫사람은 받아적으며 지시로 알고 한 것이니 내가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말 못하는 것도 있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안다고 해도 그 말에 누군가 다칠 수 있는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수 없으며 내가 책임을 지겠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검찰 조사를 마치고 그는 &#8216;한 것&#8217;, &#8216;안 한 것&#8217;, &#8216;말할 수 없는 것&#8217;으로 구분해 도장을 찍었다. 몇 개월의 조사를 마치고 검찰은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내렸고, 그는 불기소 처리되었다. 담당 검사는 철저하게 조사해야 하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많은 불편을 이해하라는 인사를 하면서 &#8220;선배님께서는 나가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이번 기회에 깨끗이 신상 세탁을 하셨기 때문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을 겁니다.&#8221;라고 하였다.</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8216;좋은 회사&#8217;가 있는 것이 아니라 &#8216;훌륭한 경영&#8217;이 있으며,</span></b></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8216;훌륭한 경영&#8217;이 있는 것이 아니라 &#8216;지혜로운 경영자&#8217;가 있는 것이다</span></b></p>
<p style="line-height: 150%;">김 전 부사장은<br />
1973년 입사해서 그 해 6월 9일 포항제철소 1고로의 출선을 본 후 포항제철소 제2, 3, 4기 그리고 광양제철소 제1, 2, 3, 4기 건설기획에 참여했다. 그는 기획으로 입사하여 기획조정실장(부사장)으로 퇴직을 했다. 포스코의 경영기획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전문가이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포항제철소 정문에 걸려 있는 &#8216;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8217;이라는 슬로건과 박태준 회장의 자택에 걸려 있는 &#8216;짧은 인생 영원 조국에&#8217;라는 좌우명은 같은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어요. 정문 글귀는 공간적인 의미로서 &#8216;형이하학적 실천&#8217;의 행동 세계이고, 자택의 것은 시간적인 의미로서 &#8216;형이상학적 지혜의 세계&#8217; 즉, 깨달음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박태준 회장의 삶의 철학이며 실천이라 생각합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이어 그는 포스코를 포함한 제조업 경영자라면 꼭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8216;공장화&#8217;가 아닌 &#8216;기업화&#8217; 즉 &#8216;Smart Factory&#8217;가 아니라 &#8216;Smart Company&#8217;와 함께 이를 넘어선 &#8216;Smart Group&#8217;을 목표로 삼는 경영이 필요합니다. &#8216;좋은 회사&#8217;가 있는 것이 아니라 &#8216;훌륭한 경영&#8217;이 있는 것이며, &#8216;훌륭한 경영&#8217;이 있는 것이 아니라 &#8216;지혜로운 경영자&#8217;가 있는 것입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그는 2011년 12월 13일 오후 5시 20분에 돌아가신 박태준 회장에 대한 추모의 말을 남기며 인터뷰를 마쳤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나라를 사랑하신 박태준 회장을 깊이 존경하고 오래 기억한다는 그는 두 시간에 걸쳐 열정을 토해냈다.<br />
그가 그려낸 포스코의 미래모습은 후배들이 성취할 사명이라고 말하며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용광로보다 뜨거운 포스코 사랑이 자리하고 있었다.</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5/nam.png" alt="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width="450" height="137" usemap="#imgmap201852142921" /></p>
<map id="imgmap201852142921" name="imgmap201852142921">
<area alt="56편 이후 모아보기" coords="1,84,220,134" shape="rect" href="https://newsroom.posco.com/kr/tag/%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 target="_blank" />
<area alt="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coords="228,83,446,135" shape="rect" href="http://www.posco.co.kr/homepage/docs/kor6/jsp/news/posco/s91fnews002l.jsp?saveText=%B3%B2%B1%E2%B0%ED%BD%CD%C0%BA%C0%CC%BE%DF%B1%E2" target="_blank" /> </map>
</div>
]]></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남기고싶은이야기 91] 김동식 前 상무이사, 바다 위 건설한 광양제철소 &#8216;경제성 세계 1위&#8217;</title>
				<link>https://dev-newsroom.posco.com/kr/%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91-%ea%b9%80%eb%8f%99%ec%8b%9d-%e5%89%8d-%ec%83%81%eb%ac%b4%ec%9d%b4%ec%82%ac-%eb%b0%94%eb%8b%a4-%ec%9c%84-%ea%b1%b4/</link>
				<pubDate>Wed, 22 Nov 2017 00:00:00 +0000</pubDate>
				<dc:creator><![CDATA[posconews]]></dc:creator>
						<category><![CDATA[사람과문화]]></category>
		<category><![CDATA[남기고싶은이야기]]></category>
									<description><![CDATA[포항제철소 3기 건설 당시 제3고로 토건공사 주감독에 이어 4기에서는 소결건설과장으로서 4소결공장 건설 책임을 맡고 있던 김동식 전 상무이사는 1979년 12월 7일 제2제철 건설계획과장에 보임되었다. 제2제철 입지선정 및 건설계획 담당이었다. &#8220;저는 4소결공장 건설 공사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div class="article">
<p>포항제철소 3기 건설 당시 제3고로 토건공사 주감독에 이어 4기에서는 소결건설과장으로서 4소결공장 건설 책임을 맡고 있던 김동식 전 상무이사는 1979년 12월 7일 제2제철 건설계획과장에 보임되었다. 제2제철 입지선정 및 건설계획 담당이었다. &#8220;저는 4소결공장 건설 공사를 다 끝내지도 못한 상황에서 떨어진 갑작스러운 명령이었어요. 당시 제2제철 건설 입지는 아산만으로 결정되어 있었고, 조사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습니다.&#8217;</p>
<div style="height: auto; border: 1px solid #d5d5d5; padding: 20px;">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left">
<tbody>
<tr>
<td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11/dot5.jpg" alt="따옴표 icon" width="100" height="100" style="margin-right: 10px;" /></td>
</tr>
</tbody>
</table>
<p><b> <span style="color: #3f699d;">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8216;남기고 싶은 이야기&#8217;를 연재합니다.</span> </b></p>
<p><b><span style="color: #3f699d;">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lt;편집실&gt;</span></b></p>
</div>
<p>&nbsp;</p>
<p><b>&#8211; 사연 많던 제2제철 건설 입지 8년 8개월 만에 광양으로 선정<br />
&#8211; 강추위 속에 지질조사··· 연약지반 개량공사로 최고 부지 만들어</b></p>
<p>&nbsp;</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left">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11/911.jpg" alt="김동식 전 상무이사 주요 경력 1945 경북 의성 출생 1968 서울대 토목공학과 1971 포스코입사 포항건선소, 토건부, 곳아부, 건설공정실, 검사역실 1978 토건1과장, 소결건설과장, 건설계획과장, 토건설비그룹 과장, 1입지담당계획과장, 건설계획과장 1983 건설1분 차장, 설계부 차장, 부장 1990 건설본부 부본부장(부소장) 1994 상무이사(철구기술부, 포스코센터건립추진반 담당) 1997 포스코건설 전무(포항공사본부장,철강사업2본부장) 1997 한보철강 부사장(파견) 2001 포스코건설 부사장(기술관리실, 구매계약실, 철강건설본부장) 2005 포스코 기술자문위원(해외투자 자문) 2009 유아산업 기술고문 상훈 1987 상공부장고나 표창(포항제철소 건설 유공) 1990 산업포장(광양제철소 건설 유공)" width="360" height="1088" style="width: 100%;"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body>
</table>
<p>포항제철소 3기 건설 당시 제3고로 토건공사 주감독에 이어 4기에서는 소결건설과장으로서 4소결공장 건설 책임을 맡고 있던 김동식 전 상무이사는 1979년 12월 7일 제2제철 건설계획과장에 보임되었다. 제2제철 입지선정 및 건설계획 담당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저는 4소결공장 건설 공사를 다 끝내지도 못한 상황에서 떨어진 갑작스러운 명령이었어요. 당시 제2제철 건설 입지는 아산만으로 결정되어 있었고, 조사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당시 포스코는 아산만 부지의 공장 레이아웃까지 어느 정도 정하고 착공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지표면과 지하암반의 성질, 암반고 등 부지와 항만의 표면과 지하의 상황을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부지위치, 안벽법선, 항로 등을 결정하는 중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아산만은 제철소와는 유난히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1967년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 입지 선정 당시부터 포항과 함께 후보지로 거론되었었고, 1974년 정부 주도의 제2제철 건설 입지로 거의 확정되기도 했습니다. 그 계획이 무산되고 민간 주도의 제2제철 건설안이 거론될 무렵인 1977년에 현대 측이 처음엔 경북의 영해를, 나중엔 충남 태안군과 서산군 사이에 있는 가로림만을 적지(適地)로 제안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1978년 6월 제2공장 사업계획서를 제시했지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10월 21일 포스코에 제2제철 입지 타당성 조사를 지시하고, 23일 박태준 사장과 함께 헬기로 가로림만을 답사했다. 이때 제2가로림만(서산군과 당진군 사이)이 입지 후보로 추가되었다. 이후 제1가로림만, 제2가로림만, 아산만 등 3곳을 대상으로 한 해외 용역회사의 타당성 조사, 건설부와 청와대 경제수석 간의 갈등 등 우여곡절을 거쳐 1979년 7월 24일 최종적으로 아산만이 포스코 제2공장 건설 입지로 확정됐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아산만이 제2공장 입지로 확정되자 포스코는 1979년 11월 30일 아산만 허허벌판에 제2공장 건설사무소(평택시 포승면)를 설치하였고, 12월 들어 제가 그쪽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명령이 난 겁니다. 이후 1980년 1월 말까지 정밀한 지질·지형 측량·해상 및 육상 보상물 조사 등을 했는데, 아산만은 제철소 입지로서는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어요. 아산만은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우리나라 최대 25만 톤급 원료선이 출입하려면 막대한 자금과 기술력이 요구되는 대규모의 갑문을 건설해야 했어요. 게다가 지질도 미세한 부유물질이 가라앉아 형성된 퇴적점토층으로서 연약지반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이 무렵 국내 정치 상황이 요동치는 가운데 제2차 오일쇼크가 일어나는 등 내우외환이 겹쳐, 우리 경제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된 1962년 이래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과 초긴축 경제정책을 펼쳤다. 막대한 정부 지원공사가 수반되는 데다 부지 기초조사를 통해 제철소 부지로 부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에 포스코는 1980년 1월 아산과 서울에 주재하던 제2공장 추진팀을 철수하였고, 4월 들어서는 팀을 해체하고 입지의 전면 재검토 작업에 착수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잘 알다시피 포항제철소 건설 당시 항만·철도·도로·용수·전기 등 5가지 인프라는 철강공업육성법에 따라 정부 지원사업으로 건설했습니다. 철강공업육성법은 2제철 건설 당시에도 살아 있었어요. 우리가 아산을 입지로 해서 제2제철 건설을 추진한 것도 포항과 같은 조건이라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바로 이 부분에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겁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결정적인 것이 항만이었다. 동해는 조수간만의 차가 40cm 정도로 작아 문제가 없었지만, 아산만은 무려 9m에 달해, 15만 톤의 배밖에 들어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건설부에서는 평택에서 당진까지의 방파제와 함께 갑문을 건설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당시 방파제와 갑문 건설에 소요되는 자금을 건설부에서는 5000억 원으로 예상했지만, 우리는 1조 원 이상이 될 것으로 봤어요. 5월 들어 국보위 재정분과위원장으로 계셨던 박태준 사장께서 당시의 국가 재정상태로 봐서 5000억 원이든 1조 원이든 정부가 지원해주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시고 저렴한 건설비로 더 빨리 건설할 수 있는 새로운 입지로 광양만을 조사하도록 지시를 내린 겁니다. 제철소를 공기 내에 지어도 정부 사업이 적기에 지원되지 않으면 가동할 수가 없으므로 박태준 사장께서 마음을 바꾸신 것으로 보입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광양만, 연약지반으로 번번이 제철소 후보지에서 제외</span></b></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연약지반 극복, 공기준수, 해상오염 방지 조건으로 부지 승인받아</span></b></p>
<p style="line-height: 150%;">광양만은 제철소 입지 선정 때마다 꾸준히 물망에 올랐으나 바다를 메워 부지를 조성해야 했기 때문에 연약지반(軟弱地盤)이 문제가 되어 번번이 제외된 지역이었다. 포스코 조사팀은 광양 지역의 부동산 투기를 우려해 김 장수나 대학의 학술조사단으로 가장해 비밀리에 예비조사를 실시한 결과 제철소 입지로서 매우 양호하며 정밀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나왔다. 조사 결과를 토대로 박태준 사장이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만나 제철소 입지로서 광양과 아산을 비교해 줄 것을 건의했다. 그 결과 5월 들어 전두환 상임위원장은 국보위 건설분과위원회에 두 지역을 비교·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박정희 대통령이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가 쉽사리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정부에서 어떻게든 지원사업을 추진했을 겁니다. 국보위에서는 건설부의 의견에 따라 원안대로 하라고 했지만, 우리가 계속 이의를 제기하니 그런 지시가 내려진 것이었어요. 1980년 6월 20일 개최된 국보위 건설분과위원회 보고회에서 유상부 전 회장도 양 지역을 비교해 브리핑하고 광양으로 건의했지만, 결국 7월 7일 포스코가 배제된 가운데 개최된 심의회의에서 건설부가 아산을 최적지로 보고함으로써 2제철 입지는 아산으로 재확정되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아산만이 광양만보다 유리하다는 결론은 잘못된 용역 결과에 기인된 것이라고 판단한 포스코는 자체 검토안을 청와대와 상공부로 발송하고 제철소 입지를 광양으로 변경해 줄 것을 재차 건의했다. 정국이 차츰 안정을 되찾자 1980년 12월 27일, 청와대에서 열린 관계관 회의에서 프랑스의 르아브르 항만청과 국토개발연구원에 △조력발전을 겸한 아산만 갑문식 항만(25만 톤) △아산만 15만 톤 감조식(感潮式) 항만 △광양만 25만 톤 항만 등 3가지 제철소 건설 방안에 대한 용역을 주고 그 결과에 따라 입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이에 포스코는 용역의 원활한 수행을 지원하고 부족한 현지 자료 등을 확보해 제공하기 위해 12월 16일 유상부 부장을 반장으로 하는 &#8216;입지계획반&#8217;을 구성해 광양 현지의 지질 등 제반조사에 들어갔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건설부는 1981년 11월 4일, 르아브르 항만청의 용역 결과를 종합 정리해 청와대에 보고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건설부는 다시 아산만갑문식 항만을 건의하는 것으로 보고안을 확정했는데, 포스코는 건설부의 보고와 별도로 자체 검토한 의견을 건의하기로 했어요. 이후 우여곡절 끝에 부총리 보고까지 마친 건설부 보고서에 포스코의 주장을 반영해, 결론적으로 아산과 광양의 부지 조건이 경제적으로는 유사하므로 실수요자인 포스코의 의견을 감안해 결정해 주실 것을 건의하기로 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청와대 보고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포항제철소를 이미 성공적으로 건설·가동한 포스코의 경험을 높이 사 제2제철 입지를 광양만으로 최종 확정했다. 다만 &#8220;포항제철은 연약지반에 대한 기술상의 어려움을 책임지고 해결할 것이며, 1기설비 준공 공기를 준수하고 해상 오염을 최소화할 것&#8217;을 강조했다.</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1200만 톤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부지 450만 평 확보</span></b></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세계 최대 25만 톤 선박 접안이 가능한 꿈의 제철소 실현</span></b></p>
<p style="line-height: 150%;">&#8220;이로써 1973년부터 논란을 거듭해 왔던 제2제철 입지 선정 드라마가 8년 8개월 만인 1981년 11월 4일 광양으로 매듭지어졌어요. 그해 12월 1일 현지에 파견한 선발대 48명으로 광양군 진월면사무소 앞마당에서 건설사무소 개소식을 가졌습니다. 이 무렵 포스코는 포항 4기설비 준공에 따른 설비안정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제2제철의 조속한 건설을 위해 지질조사팀 등을 확대 구성해 12월 24일 광양 현지로 보냈어요.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해상의 평균 기온이 영하 10도로 사람이 해상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아침에 숙소에서 싸온 김밥이 얼어붙어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질조사팀장이었던 이명섭 차장이 추위를 견디게 하려고 소주를 반주로 권했는데, 당시 작업원들 중에는 이 때문에 위장병을 얻은 사람도 있었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1982년 5월 30일까지 지질조사로 25개 공을 시추하고 실내시험을 마쳤다. 예상했던 대로 연약지반으로 나타나 공장 건설 지역은 추가시추 조사를 하는 등 기초조사에 만전을 기했다. 연약지반 위에 각종 설비를 건설하고 조업 중에 하중이 추가되면 침하 및 지층 붕괴 등의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개량 대상 지역의 토성을 더욱 정밀하게 분석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크게 보면 광양만은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입니다. 광양제철소가 현재의 위치로 확정되기까지는 상당 기간 동안 지속적인 연구와 조사 작업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 지역은 1973년 제2제철 건설 타당성을 검토할 때 KIST가 최초로 제안했어요. 반면 건설부에서는 소당도 주변을 적지로 고려하고 있었고, 한국종합제철에서는 경남 하동군 금남면을 주로하여 전남 광양군 골약면에 이르는 지역을 정한 바 있었습니다. 1982년 4월 부지 기본 설계와 항만 기본 설계에서 부지 외곽 좌표와 항만법선(港灣法線)이 확정되면서 오늘날의 위치가 정해진 겁니다. 이후 토지 보상, 주민 이주, 어업권 보상 그리고 계속된 민원 해결 등에 얽힌 일화는 여러 관계자를 통해 많이 회자된 바와 같습니다. 특히 건설 엔지니어의 시각으로 당시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자 합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광양제철소의 부지 면적은 공장부지, 수토장(受土場), 주택단지 등 총 1488만m²(450만 평)에 이른다. 광양제철소의 부지는 주로 바다를 매립해 조성해야 했기 때문에 부지 측량 등 조사 작업과 설계, 적절한 공장 배치 계획, 호안공사와 준설 매립, 연약지반 개량공사 등의 공정을 거쳐야 했다. 기준면은 평균 수준면(바닷물의 평균 높이)으로 정한다. 1981년 3월부터 1982년 2월까지 1년간 광양제철소 부지에 인접한 지진도에서 연속 조위 관측을 실시해 이때 나온 기본 수준면을 공장 기준면으로 채택하였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부지 계획고는 간만의 차와 각 배수로의 홍수 시 예상 수면고(水面高)를 산정하고 여기에 부지의 여유고를 가산해 결정했습니다. 부지 여유고를 크게 할수록 홍수가 났을 때의 안정성은 커지지만 준설매립 비용이 많이 소요되므로 최소의 여유고를 가산해 가장 경제적인 부지고를 계획했어요. 그때 회사의 자금 사정이 소본부와 백운대의 칸막이벽을 블록으로 지을 정도로 매우 빠듯했는데, 지표를 1cm 올리는 데 1억 원이 소요되는 거예요. 이러한 분석 내용을 고 사장에게 보고했더니 최대한 낮추라고 했어요. 그래서 계획보다 50cm 낮췄는데, 최근 제철소를 방문했을 때 마침 저기압에 만조가 겹쳐 압연지역 일부 도로에 해수가 들어오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빨리 부지를 돋우는 보완공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1982년 9월 28일에는 총연장 13.6km의 제방을 건설하는 호안축조공사가 착공되었다. 부지 내에 있는 소당도, 금당도, 비운도 등의 섬을 발파한 돌로 제방을 쌓았는데, 단단하지 못한 돌이 많아 호안 수명 등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감사팀에서는 1983년 7월 6일까지 공구별로 호안 불량 개소를 점검했는데, 박태준 회장은 7월 13일 임원회의에서 수중의 시공 상태를 특별히 확인하라고 지시했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스쿠버 경험이 많은 감사팀 직원이 수중 감사에 착수했어요. 그 과정에서 한종웅 당시 감사역은 급류에 휘말려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11월 12일 가장 난공사인 최종 물막이 공사를 완료함으로써 호안을 완전히 육로로 개통시켰어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바다 위 제철소 짓는데 6000만 입방미터 준설토 매립</span></b></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공유수면 매립해 평당 단가의 10분의 1로 부지 확보</span></b></p>
<p style="line-height: 150%;">바다 위에다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공유수면(公有水面)의 준설, 매립이 선행되어야 했다. 평균 매립고는 4.5m였다. 착공 초기에는 하루 24시간의 철야 공사로 준설 작업량이 하루 평균 5만m³에 달했고, 준설토 총량은 연약지반개량공사, 후기매립지공사 등이 추가되어 최종 5920만m³에 이르렀다. 이는 여의도 63빌딩 만한 건물 140동과 맞먹는 엄청난 물량이었다. 공사 절정기였던 1983년 9월 들어 준설선단의 규모는 총 10개 선단, 4만 2300마력으로 우리나라 총 보유선단의 70%가 광양 현장에 투입되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당초 공장부지 270만 평 중 1, 2기 540만 톤 확장에 필요한 170만 평과 지원시설 및 주택단지로 사용될 금호도 60만 평 등 총 230만 평을 1단계로 매립해 1984년 11월 31일 완료했습니다. 이후 3, 4기 건설 지역은 1985년 4월 30일, 연관단지는 9월 20일 공사를 마쳤습니다. 지금은 공유수면을 매립하더라도 그 땅을 사업주가 그냥 가질 수가 없습니다. 공사 소요 경비와 관계없이 취득 시 인근 지역의 땅값으로 사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허가를 받아서 매립하면 사업자가 그 땅을 가질 수 있었어요. 광양도 그랬습니다. 보상비와 부지조성에 소요된 총공사비를 합산해 평당 단가를 계산해 보니 3만 5000원이었어요, 그 넓은 부지를 시가의 10분의 1 가격으로 구입한 셈이어서 이는 광양제철소 경쟁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광양제철소 부지는 섬진강 하구 남측의 저지대로서 밀물 때는 해수가 밀려들어 오고 물이 빠지면 모래언덕이 드러나는 간석지이지만,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서 섬진강 하구 정면 양질의 흙을 준설하여 조성했다. 제철소를 건설할 때 예상되는 첫 번째 문제는 원지반의 지질 구조인데, 이 지역의 지질 구조는 상부의 느슨한 모래층과 중앙부의 점토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앙부 중적층의 구조적 특징은 큰 함수비(含水比)와 변화율인데, 이 흙은 투수력(透水力)이 대단히 작아서 흙 속에 포함된 물이 완전히 배출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이로 인한 침하가 예상되는 흙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연약한 땅을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는 양질의 부지로 바꾸는 과정을 &#8216;연약지반 개량&#8217;이라고 해요. 느슨한 상부 모래층의 밀도를 증대시키고 중간 점토층에는 모래말뚝 또는 모래다짐말뚝을 박은 다음 흙으로 하중을 가해 원지반 흙에 포함된 물을 강제로 외부로 배출시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모래 기둥을 촘촘히 세워 물이 빠지는 고속도로를 만들어주는 거지요. 국내 최초의 대규모 연약지반 개량공법을 도입하기 위해 1983년 10월 나는 직원 4명과 함께 일본 연약지반 개량 현장(홋카이도부터 히로시마까지 주요 해안 매립공사장)을 견학하고 실내 토질시험 방법을 습득하기도 했습니다.&#8221;</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center">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11/14.jpg" alt="1984년 1월 20일 김동식 건설1부 차장(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이 광양제철소 연약지반 개량공사 착공식에서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width="450" height="467"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r>
<td style="padding: 5;" align="center" width="450">
<p align="left"><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1984년 1월 20일 김동식 건설1부 차장(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이 광양제철소 연약지반 개량공사 착공식에서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p>
</td>
</tr>
</tbody>
</table>
<p>&nbsp;</p>
<p style="line-height: 150%;">지반 개량공사는 초기에는 일본에서 기술자를 초빙해 지도를 받기도 했다. 12대의 타설기 조립 작업이 끝난 후 1984년 1월 20일 본격적인 개량공사에 들어갔으나 바람이 불면 높이 40m에 달하는 &#8216;모래기둥 타설기&#8217;가 쓰러지는 등 예정대로 공사가 진척되지 않았다. 유난히도 추웠던 그해 겨울 바닷바람과 싸우면서 착공 4개월 만에야 작업 진도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center">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11/21.jpg" alt=" 1984년 9월 김동식 건설1부 차장(왼쪽)이 윤의광 건설1부장과 배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 width="450" height="508"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r>
<td style="padding: 5;" align="center" width="450">
<p align="left"><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1984년 9월 김동식 건설1부 차장(왼쪽)이 윤의광 건설1부장과 배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p>
</td>
</tr>
</tbody>
</table>
<p>&nbsp;</p>
<p style="line-height: 150%;">&#8220;연약지반개량공사를 수행하면서 기술자립도 향상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 결과 설계, 공사, 침하안정관리 등의 독자적인 시스템을 개발해 적용했습니다. 추가공사 때부터는 전부 자체 기술로 시행할 수 있었고, 훗날 공사 경험을 대외 판매가 가능한 기술자료로 등록시킬 만큼 기술을 축적했습니다. 그 경험을 건설기술자들의 보수교육에 소개하기도 했고, 1990년 인천공항 건설 계획 시 기술자문위원으로서 대규모 부지조성과 지반개량 경험을 전파했습니다. 또 경북대, 서라벌대, 선린대 등 관련 학과 학생들에게도 전파교육을 한 바 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기술자로서 선망하는 경력 모두 거쳐 </span></b></p>
<p style="line-height: 150%;">그는 1971년 3월 1일 공채 3기로 입사한 후 석 달 동안 5급으로 근무했다. 포항제철소 부지 준설은 거의 끝나 있었는데, 황량한 제철소 부지 한가운데로 뚫린 중앙도로가 눈에 들어오자 제철소에 이렇게 넓은 도로가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던 기억을 떠올렸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포항 1기 건설이 끝날 때까지 건설본부 제강건설과에서 근무했습니다. 2기 때는 2년 3개월간 감사실 계장으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실은 회사 내 다양한 부서와 연관 지어 업무를 하게 되는데, 그때 전사적인 관점에서 업무를 바라보는 눈이 생겼고, 법과 규정에 따라 일하는 방법도 터득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이야기는 다시 광양제철소로 건너뛰었다. 건설 기술자의 시각으로 볼 때 광양제철소는 세계에서 가장 콤팩트하고 효율적인 제철소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광양만 바다를 메워 소요부지를 조성했으므로 엔지니어들이 아무런 간섭 없이 가장 이상적이고 효율적인 레이아웃을 준비하고, 이에 맞춰 부지와 항만 설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면적과 생산능력을 비교하면 조강 톤당 0.7m²이 나옵니다. 건설 당시 세계적인 최신 제철소 레이아웃을 모두 비교하여 가장 콤팩트한 제철소를 계획했고, 서쪽에는 수토장, 동쪽에는 슬래그투기장을 두어 확장성에도 문제가 없도록 건설했습니다. 수토장은 매립에 부적합한 흙을 모아놓은 곳인데, 시간이 지난 후 여기에 CGL 등 2차 압연공장을 지으면 좋겠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또 여수 외항으로부터 좁고 깊은 수로를 통해 20km 내륙으로 들어온 곳에 위치한 광양항은 파도가 없고 지금은 35만 톤 대형 선박까지 접안이 가능합니다. 35만 톤 선박 한 척이 광양항에 일부 하역 후 포항항에도 하역한다면 포항제철소의 경쟁력 향상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1997년 한보철강 부도 시 회생대책반을 거쳐, 그해 11월부터 5년여 동안 포스코건설 전무·부사장으로 일하다가, 2005년 다시 포스코로 돌아왔다. 2009년까지 4년 동안 해외투자 기술자문을 맡았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 그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아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인도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당시 여러 가지로 여건이 맞지 않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베트남에서도 합작투자 요청이 있었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철광석 광산·항만 위치 등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제철소와는 맞지 않았어요. 아마도 국내외를 막론하고 광양제철소만큼 경쟁력 있는 입지는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광양제철소 입지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제철소 확장 또는 연관 산업을 많이 발굴하여 회사 발전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8221;</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5/nam.png" alt="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width="450" height="137" usemap="#imgmap201852142921" /></p>
<p style="line-height: 150%;">
<map id="imgmap201852142921" name="imgmap201852142921">
<area alt="56편 이후 모아보기" coords="1,84,220,134" shape="rect" href="https://newsroom.posco.com/kr/tag/%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 target="_blank" />
<area alt="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coords="228,83,446,135" shape="rect" href="http://www.posco.co.kr/homepage/docs/kor6/jsp/news/posco/s91fnews002l.jsp?saveText=%B3%B2%B1%E2%B0%ED%BD%CD%C0%BA%C0%CC%BE%DF%B1%E2" target="_blank" /> </map>
</p>
</div>
]]></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남기고싶은이야기 90] 한수양 前 부사장, STS 일관체제 완성··· 세계적인 STS 메이커로 육성</title>
				<link>https://dev-newsroom.posco.com/kr/%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90-%ed%95%9c%ec%88%98%ec%96%91-%e5%89%8d-%eb%b6%80%ec%82%ac%ec%9e%a5-sts-%ec%9d%bc%ea%b4%80%ec%b2%b4%ec%a0%9c-%ec%99%84/</link>
				<pubDate>Mon, 28 Aug 2017 00:00:00 +0000</pubDate>
				<dc:creator><![CDATA[posconews]]></dc:creator>
						<category><![CDATA[사람과문화]]></category>
		<category><![CDATA[남기고싶은이야기]]></category>
									<description><![CDATA[2016년도 포스코의 스테인레스 조강생산량은 연간 326만 톤으로 전세계 생산량의 10%에 육박한다. 매출액은 6조 5000억 원으로 포스코 국내 매출의 15% 정도이다. 이는 스테인리스 일관 조업을 시작한지 27년 만에 이룩한 성과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값지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div class="article">
<p>2016년도 포스코의 스테인레스 조강생산량은 연간 326만 톤으로 전세계 생산량의 10%에 육박한다. 매출액은 6조 5000억 원으로 포스코 국내 매출의 15% 정도이다. 이는 스테인리스 일관 조업을 시작한지 27년 만에 이룩한 성과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값지다. 그 보다 더 큰 의미는 포스코가 탄소강 위주의 생산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특수강 분야에서도 크게 성공을 거두어 세계 철강 업계를 놀라게 했다는 점이다.</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right">
<tbody>
<tr>
<td align="center" valign="top"><a href="http://www.posco.co.kr/homepage/docs/kor5/dn/prcenter/news/namgi_90.pdf" target="_blank" rel="noopener"><img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08/btn_pdf_down.jpg" style="width: 100%;" /></a></td>
</tr>
</tbody>
</table>
<div style="height: auto; border: 1px solid #d5d5d5; padding: 20px;">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left">
<tbody>
<tr>
<td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08/dot5.jpg" alt="따옴표 icon" width="100" height="100" style="margin-right: 10px;" /></td>
</tr>
</tbody>
</table>
<p><b> <span style="color: #3f699d;">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8216;남기고 싶은 이야기&#8217;를 연재합니다.</span> </b></p>
<p><b><span style="color: #3f699d;">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lt;편집실&gt;</span></b></p>
</div>
<p>&nbsp;</p>
<p><b>&#8211; 스테인리스 설비 도입에서부터 품질 안정화까지 일임<br />
&#8211; 직책이 올라갈수록 더 많이 공부하고 노력해야</b></p>
<p>&nbsp;</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left">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08/0909990.jpg" alt="한수양 전 부사장 주요 경력 1994 전북 옥구 출생 1964 서울대 금속공학과 1971 포스코 입사  압연설비부, 압연부, 압연2부 분과공장 기술계장, 정정계장, 생상관리부 생상계획계장  열연2부 2분과공장장, 분과선재기술과장, 2연주공장장 생산관리부 차창  스테인리스사업추진반 부장, 스테인리스사업부장, 뉴프로/추진반장(부소장),  스테인리스증강사업추진반장, 포항제철소 부소장(상무이사) 1997 포스코특수강 대표이사 부사장  1998 광양제철소장(전무이사, 부사장) 2004 포스코건설 대표이사 사장 2005  한국주택협회 감사 한국건설경영협회 부회장 상훈 1978 상공부장관 표창 (2분괴공장 건설 유공자)  1992 국무총리 표창 (제조업 경쟁력 강화) 1998 대한금속학회 특별상 2000  철탑산업훈장 (에너지절약 유공)" width="360" height="1151"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10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body>
</table>
<p>2016년도 포스코의 스테인레스 조강생산량은 연간 326만 톤으로 전세계 생산량의 10%에 육박한다. 매출액은 6조 5000억 원으로 포스코 국내 매출의 15% 정도이다. 이는 스테인리스 일관 조업을 시작한지 27년 만에 이룩한 성과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값지다. 그 보다 더 큰 의미는 포스코가 탄소강 위주의 생산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특수강 분야에서도 크게 성공을 거두어 세계 철강 업계를 놀라게 했다는 점이다.</p>
<p style="line-height: 150%;">한수양 전 부사장은 &#8220;스테인레스강 사업을 처음 시작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낸 후배들에게 한 없는 찬사를 보낸다&#8221;고 말했다.</p>
<p style="line-height: 150%;">말썽 많고 탈도 많았던 2분괴공장장, 2연주공장장을 거쳐 생산관리부차장으로 보임되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한수양 전 부사장은 다시 스테인리스사업추진반장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1985년 11월 22일 박태준 회장이 직접 지시해 떨어진 명령이었다. 당시 스테인리스 설비는 경영정책실에서도 전혀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생소한 분야였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포항제철에서 설비를 신설 또는 증설할 경우 경영정책실에서 검토를 거쳐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설비기술본부에서 설비 계획을 세우고 외자부에서 해외 설비 메이커에 발주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작과 건설을 맡기고 하면서 추진하는 거였어요. 그 과정은 매우 엄밀하고 긴 시간이 소요되었지요. 그런데 스테인리스 설비는 경영정책실이나 설비기술본부의 검토 거치지 않고 바로 사업 추진에 들어갔으니, 생판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스테인리스 사업은 원래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중공업은 독일의 유명한 스테인레스 생산업체로 설비제작도 겸하고 있던 티센에 용역을 주어 12권으로 된 용역결과보고서까지 받아둔 상태였다. 창원사업소에 스테인리스 전기로와 연주기를 설치해 슬래브를 제조하고 포항제철소로 보내 압연한 후 핫코일이 만들어지면 이걸 다시 창원에 있는 삼미특수강 냉연공장으로 가져가 최종 제품을 생산한다는 계획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그래서 한국중공업에서 박태준 회장에게 자기들이 생산한 슬래브를 핫코일로 압연해 달라고 요청한 거에요. 잘 알다시피 박태준 회장은 &#8216;철강업은 운송업&#8217;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어요. 그런데 그 무거운 것을 창원에서 포항으로, 다시 포항에서 창원으로 옮기는 것 자체가 모두 비용인데,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니 이 사업은 포스코가 해야 할 일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관계 부서의 검토도 생략한 채 바로 저에게 지시를 내린 것이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박태준 회장 지시로 스테인리스 사업 추진 나서</span></b></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한국중공업과 2강 구도··· 삼미특수강 지지로 사업권 획득</span></b></p>
<p style="line-height: 150%;">이 사업에는 한국중공업 외에 슬래브 압연설비를 갖춘 포스코, 스테인레스 냉연설비를 갖춘 삼미특수강 그리고 강원산업(현 현대제철 포항공장)이 사업다각화라는 명분으로 참여하여 4개사가 실수요자 경쟁에 뛰어 들었다.</p>
<p style="line-height: 150%;">실수요자 선정을 두고 밀고 당기는 상황이 이어지다가 1986년 2월 경쟁 4사가 참석한 가운데 상공부 주재로 엔지니어클럽에서 마지막회의가 개최되었어요. 한국중공업과 포스코가 2강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포스코가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한중은 이미 사업을 상당히 진척시켜 놓은 상태였으니까요 한국중공업이 먼저 나섰어요. 그런데 묘하게도 그날 회의를 주재한 좌장이 김학기 전 부사장(2대 포항제철소장)이었습니다. 한국금속학회장 자격으로 좌장을 맡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발표에 나선 한국중공업 임원은 군 출신이었는데 매우 똑똑하게 보이는 인상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입을 열자마자 작심한 듯 일갈(一喝)을 날렸다.</p>
<p style="line-height: 150%;">&#8211; 이 자리에 여러분이 나와 계시지만, 다들 스테인리스의 &#8216;S&#8217;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뭘 안다고 떠드는 거요.</p>
<p style="line-height: 150%;">평소에 점잖은 성품으로 정평이 나있는 김학기 전 부사장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노기 띤 목소리로 꾸짖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11; 여보시오. 이 자리에는 대한민국에서 철강에 대해서는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어디다 대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p>
<p style="line-height: 150%;">일순 분위기가 반전된 가운데 포스코의 발표가 이어졌다. 발표가 끝난 뒤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삼미특수강의 윤직상 사장이 포스코를 거들고 나선 것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11; 어느 회사가 생산하든 스테인리스 핫코일을 쓰는 곳은 결국 우리 삼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량 수입해서 썼는데, 국내에서 포스코가 핫코일을 생산한다면 우리는 그걸 쓰겠습니다. 그러나 그 외 다른 회사에서 만든 것이라면 우리는 쓰지 않겠습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이 대목에서 게임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수요처에서 포스코 제품이라야 쓰겠다는데 다른 시비가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삼미는 실수요자 경쟁에 뛰어들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냉연을 지키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었어요. 삼미로 봐서는 어느 모로 보나 포스코가 믿음직스러웠겠지요. 뭐가 잘못되더라도 책임을 질 수 있는 회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스테인리스강 제품 생산은 가장 먼저 전기로에서 쇳물을 끓여 진공처리한 후 연주로 보내 슬래브를 생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슬래브는 다시 열연공장으로 보내져 핫코일로 만들어지고, 핫코일은 산세-소둔 공정을 거쳐 최종 제품인 스테인리스 냉연코일로 탄생한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설비계획을 위해서는 한국중공업이 독일 티센으로부터 받아놓은 12권의 용역보고서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요긴한 일이었습니다. 그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마침 그걸 관리하고 있던 한국중공업 상무가 대학 선배였는데 흔쾌히 저희 요청을 받아 들여 주었습니다. 그걸로 공부를 하고 설비계획을 세웠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검토 결과 독일의 티센(Thyssen)과 크루프(Krupp), 이태리의 이탤림피안티(Italimpianti), 영국의 BSC(British Steel Corporation), 미국의 엘리거니러들럼(Allegheny Ludlum) 이렇게 5개사를 설비 공급과 노하우 제공이 가능한 회사로 판단했다. 판단이 내려지자 곧 바로 5개사 방문에 나섰다. 박준민 부소장, 이윤 과장과 연주, 열연, 소둔산세 각 1명 그리고 한수양 전 부사장, 이렇게 6명으로 방문단을 꾸려 한달반 동안 기술협의를 진행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5개사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국제입찰을 준비했는데, 당시 관리실에서 편성한 스테인리스 설비 구매 예산이 매우 적었습니다. 그 돈으로 과연 설비를 구매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당시 전 세계적으로 설비 제작업체들이 일감이 부족했기 때문에 염가로 구매할 수 있었어요. 최종적으로 전기로와 정련로는 독일의 크루프, 연주는 오스트리아의 VAI, 소둔산세는 영국의 BSC로 결정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스테인리스 강판 품질 절반은 열연공정이 결정</span></b></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김광수, 최용준 등이 스테인리스 압연 물심양면 도와</span></b></p>
<p style="line-height: 150%;">공장 가동 후 가장 어려운 것이 포항 2열연공장에 의뢰한 압연이었다. 당시 철강 시황이 매우 좋아 판매가격이 치솟았기 때문에 열연공장에서는 일반강을 최대 생산하면 그게 다 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열연공장은 설비 컨디션과 압연 온도를 다시 조정해야 하고 작업 조건이 까다롭기 짝이 없는 스테인리스 슬래브의 압연을 기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압연이 끝나면 흠이 있느니 평탄도가 떨어지느니 하며 이런저런 시비가 많으니 달가워할 리가 만무했다. 한마디로 편하게 일하면서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데, 공연히 스테인리스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면서 힘들게 일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center">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08/110.jpg" alt=" 1992년 1월 15일 기술력향상 결의대회를 열고 세계적인 스테인리스 기술로 도약할 것을 다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화합·동참·전진' 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당시 한수양 스테인리스사업부장(기념비 오른쪽 첫 번째)과 직원들." width="450" height="330"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r>
<td style="padding: 5;" align="center" width="450">
<p align="left"><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1992년 1월 15일 기술력향상 결의대회를 열고 세계적인 스테인리스 기술로 도약할 것을 다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8216;화합·동참·전진&#8217; 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당시 한수양 스테인리스사업부장(기념비 오른쪽 첫 번째)과 직원들.</p>
</td>
</tr>
</tbody>
</table>
<p>&nbsp;</p>
<p style="line-height: 150%;">&#8220;스테인리스 강판의 품질은 반 이상이 열연 공정에 달렸어요. 나중에 냉연공장까지 준공되고 나서는 제강에서부터 냉연까지 모든 설비가 스테인리스 전용이었지만, 열연공정만은 기존 설비에 의뢰해야 했으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김광수 현 스테인리스마케팅실장(전무)과 최용준 현 포항 압연부소장(상무)이 당시 열연기술과소속이었는데 적극적으로 스테인리스 압연에 달라붙어 주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매우 고마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때 이미 철강산업의 앞날을 내다보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초기에는 스테인리스 냉연공장이 없었기 때문에 생산한 핫코일 전량을 삼미특수강 창원공장에 공급해야 했다. 당시 삼미는 세계 최고 품질의 핫코일을 수입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포스코가 공급하는 핫코일은 스크랩이나 다름없다면서 이걸로는 도저히 냉연제품을 만들 수 없다고 불만을 표시해 왔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창원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 삼미 사장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용쓰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아무리 해봤자 쉽게 품질을 끌어올릴수는 없을 터이니 나더러 계속 그 자리에서 1년을 버티기 어려울 거라는 거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현장을 꼼꼼히 살피면서 문제점을 파악했습니다. 스테인레스부 직원 전원과 기술연구소 요원들이 있는 힘을 다하면서 품질이 차츰 안정되어 갔습니다. 그때 마침 삼미가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값비싼 수입 소재를 구매할 여력이 없어졌고, 우리가 가격을 맞춰주니 서로 이해가 맞아떨어졌어요. 게다가 삼미 공장장이 포스코의 핫코일 품질이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향상되고 있다고 상부에 보고하면서 고비를 넘겼습니다. 우리가 삼미 현장에 가서 온갖 정성을 다한 것은 물론이고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포스코가 스테인리스 사업에 손을 댈 당시 삼미에는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포스코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포스코가 열연만 하고 말 회사가 아니고 언젠가는 냉연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스테인리스 &#8216;열연 → 냉연&#8217; 진출까지···결자해지</span></b></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창원특수강 부임해 종업원 승계 등 인수 진행</span></b></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 </span></b></p>
<p style="line-height: 150%;">&#8220;1989년 3월 31일 포항 스테인리스 설비 준공식 때 박태준 회장이 포스코는 냉연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삼미 경영진은 비로소 걱정을 떨쳐버리고 자축 파티까지 열었습니다. 그러나 스테인리스는 핫코일만으로는 돈벌이가 되지 않아요. 상공정에서는 고생만 하고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지. 재주는 곰이 하고 돈벌이는 누가 한다는 말 그대로예요. 그래서 박태준 회장께 냉연을 해야겠다고 보고를 드렸고 이후 사업이 신속하게 추진되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삼미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포스코의 독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다른 냉연업체의 반발 기류도 뚜렷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1990년 7월 31일 냉연공장이 준공되고 제품이 나오기 시작하고 얼마 가지 않아 삼미가 부도가 났고 우리 회사가 1997년 2월 삼미 창원공장을 인수해 창원특수강을 설립했다. 김만제 회장은 그에게 &#8220;지금까지 당신이 스테인리스를 맡아 했으니 창원특수강으로 가서 책임경영을 하라&#8221;고 했다.</p>
<p style="line-height: 150%;">창원특수강에는 2000명 정도의 종업원이 있었다. 그 안에는 창원 지역 노조를 쥐었다 폈다 하는 강성 인물 182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인수 계약서에는 종업원을 승계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사람을 받기는 받되 그냥 받을 수는 없고, 개개인의 면접을 통해 받겠다고 했다. 그 말을 뒤집으면 면접을 거부하는 사람은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골수 멤버 182명은 종업원들이 면접실에 가지 못하도록 온갖 훼방을 다 놓았고 심지어는 섬찟한 말로 협박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종업원들은 처음엔 주저하다가 결국 대다수가 면접에 응했어요. 그때 면접을 통해 받은 사람 수가 1700명 정도 되었습니다. 182명은 끝까지 거부해 승계 대상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지요. 면접을 거부한 182명은 하루도 빼지 않고 시위를 계속했고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야 최종적으로 포스코의 입장이 옳다는 판결을 얻어 냈습니다. 회사로서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했지만 포스코의 흔들리지 않는 경영철학을 국내 산업계 전체에 확실하게 각인 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8221;</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center">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08/26.jpg" alt="한수양 창원특수강 대표이사 부사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1997년 7월 31일 김만제 회장에게 생산제품을 설명하고 있다. " width="450" height="469"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r>
<td style="padding: 5;" align="center" width="450">
<p align="left"><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한수양 창원특수강 대표이사 부사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1997년 7월 31일 김만제 회장에게 생산제품을 설명하고 있다. 창원특수강은 포스코가 1997년 2월 17일 삼미특수강 창원공장의 봉강 및 강관설비를 인수해 설립한 회사다.</p>
</td>
</tr>
</tbody>
</table>
<p>&nbsp;</p>
<p style="line-height: 150%;">그는 1971년 공채 3기로 포스코에 입사했다. 그 해 10월부터 일본 가마이시(釜石)제철소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열연부 강편공장 기술원으로 3교대 근무에 들어갔다. 초창기의 대졸 작업장이었다. 그는 1975년 열연부장에서 생산관리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세기 부장의 요청으로 생산관리부 생산계획계장을 맡아 2년간 생산계획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p>
<p style="line-height: 150%;">그 뒤 한수양 전 부사장은 1977년 7월 2분괴공장장에 보임되면서 자리를 또 옮겼다. 2분괴공장은 프랑스 설비였다. 포스코에서 포항, 광양을 통틀어 프랑스 설비는 2분괴공장이 유일하다. 그때까지 포스코는 거의 모든 설비를 일본에서 들여왔고, 극히 일부만 독일, 오스트리아로부터 도입했다.</p>
<p style="line-height: 150%;">프랑스 설비는 조업요원, 정비요원 모두에게 애를 가장 많이 먹이는 대표적인 설비였다. 2분괴공장은 제강에서 보내온 잉곳(鋼塊)을 균열로에서 재가열한 뒤 압연 라인을 거쳐 슬래브와 블룸을 제조하는 공장이었다. 제강에서 보내온 개당 20~25톤 중량의 잉곳이 하룻밤만 지나도 산처럼 쌓이는데, 2분괴공장은 그걸 제대로 처리해 내지 못했다. 기계와 전기 양쪽에서 고장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바람에 제대로 조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집에는 가끔 가서 속옷만 갈아 입고 나올 뿐 밤낮으로 공장을 지켜야 했습니다. 당시 최근주 열연2부장께서 퇴근하시면서 아예 부장차를 제게 맡기셨습니다. 밤중에 고장이 나면 효자 주택단지에 있는 슈퍼바이저를 데리고 오도록 배려하신 겁니다. 그 시절 회사문화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조치였고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마운 분이었어요. 회사 일은 근무시간 내에 열심히 하고 퇴근 후는 자기시간이라는 생각이 철저한 프랑스 기술자를 한밤중에 데리고 나온다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2분괴공장이 정상화될 때까지 4~5개월 동안 엄청난 고생을 했죠.&#8221;</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100차지 연연주 도전 성공··· 직원들에게 자신감 불어넣어</span></b></p>
<p style="line-height: 150%;">2분괴공장이 차츰 안정되어 갈 무렵 잠시 분괴기술과장으로 갔다가 1982년 1월 준공한지 얼마 되지 않은 2연주공장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생바가지만 찾아 다닌 셈이다. 연주조업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주조 초기에 발생하는 브레이크아웃(Break Out), 즉 슬래브가 주조를 시작하자마자 터져 버리는 것이다. 슬래브가 터지면 쇳물이 롤러 등의 기계에 눌어붙어 굳어버리고 공장은 완전 정지상태가 되는 것이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제가 2연주공장장으로 일하던 2년 동안 브레이크아웃이 54회 발생했으니까 평균 2주에 한번 꼴인 셈이에요. 눌어붙은 쇳덩이를 산소 토치로 녹여서 다 떼어내려면 짧게는 8시간, 길게는 12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작업원들은 1200~1300도를 오르내리는 그 비좁고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데를 비집고 들어가 정말 험난하기 짝이 없는 일을 해내야 했어요. 복구를 마치고 나오는 그들을 옆에서 보기가 민망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얼마 전 현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물었더니 요즘은 브레이크아웃이 일년에 한번 날까 말까 한다는 군요. 엄청난 발전이에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그는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축 처져 있는 직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줄까 생각하다가 떠올린 것이 연연주(連連鑄)기록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래들에 실려오는 쇳물 1차지는 300톤, 당시 기술로 3~5차지의 연연주가 가능했다. 그는 100차지 연연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턴디시를 바꿔가면서 300톤짜리 100차지를 연속으로 주조하면 모두 3만 톤입니다. 당시 박득표 제철소장-조용선 부소장 체제였는데, 정용희 2제강공장장과 호흡을 맞춰서 진행한 결과 1983년 10월 7일 12시30분부터 10월 10일 오후 5시까지 77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드디어 100차지 연연주에 성공했습니다. 제철소장 표창과 함께 동료직원들의 환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기뻤습니다.&#8221;</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center">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08/33.jpg" alt=" 한수양 2연주공장장은 직원들의 모습" width="450" height="372"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r>
<td style="padding: 5;" align="center" width="450">
<p align="left"><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1983년 10월 10일 당시 한수양 2연주공장장은 정용희 2제강공장장과 협력해 100연연주를 달성했다. 당시 2연주공장은 조업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수시로 사고가 발생했고 직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복구작업에 애를 먹었다. 한수양 2연주공장장은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100차지 연연주에 도전했고 결국 성공했다. 당시 선진 철강사도 5차지 연연주 조업을 하던 때였는데, 이는 엄청난 성과였고 직원들은 자신감을 회복했다.</p>
</td>
</tr>
</tbody>
</table>
<p>&nbsp;</p>
<p style="line-height: 150%;">한수양 전 부사장은 1998년 3월 광양제철소 소장으로 명령을 받았다. 광양제철소는 포항보다 생산 규모가 컸지만 지원 시스템은 본사가 있는 포항에 비해 많이 허술했다. 포항은 본사의 총무부와 홍보실에서 대 지역, 대 언론 문제를 담당했으나, 광양의 경우 제철소장이 대외기관 그리고 지역사회 문제까지 책임 하에 모두 해결해야 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1998년 3월부터 2004년 3월까지 만 6년 동안 광양제철소장으로 일했습니다. 유상부 회장과 이구택 사장께서는 거의 모든 업무를 소장 전결로 처리하도록 해주셨어요. 잡다한 문제에 신경 쓰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이지요. 이렇게 훌륭하신 상관을 모시고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제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8221;</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center">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08/41.jpg" alt=" 1999년 2월 16일 유상부 회장이 설 명절에도 근무에 여념이 없는 직원들을 격려하고자 광양제철소를 찾았다. 왼쪽 세 번째부터 신성용 상무, 정용희 상무, 고문찬 상무, 한수양 광양제철소장, 유상부 회장, 유병창 상무, 이구택 사장, 김진천 상무, 최광웅 전무, 이윤 상무, 김용근 상무." width="450" height="436"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r>
<td style="padding: 5;" align="center" width="450">
<p align="left"><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1999년 2월 16일 유상부 회장이 설 명절에도 근무에 여념이 없는 직원들을 격려하고자 광양제철소를 찾았다. 왼쪽 세 번째부터 신성용 상무, 정용희 상무, 고문찬 상무, 한수양 광양제철소장, 유상부 회장, 유병창 상무, 이구택 사장, 김진천 상무, 최광웅 전무, 이윤 상무, 김용근 상무.</p>
</td>
</tr>
</tbody>
</table>
<p>&nbsp;</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진정한 리더, 겸손한 자세로 사람들 마음 모을 줄 알아야</span></b></p>
<p style="line-height: 150%;">광양제철소장 6년 동안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이 2006년 4월부터 11월까지 7개월 동안 이어진 산소공장 전기 트러블이었다. 당시 광양에는 12개의 산소공장이 있었다. 제철소에서의 산소는 인체에서의 산소와 꼭 같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특히 제강공장은 산소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는 것이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12개 산소공장 중 많으면 한꺼번에 8~9개 까지도 다운되는 사고가 일곱 달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자체적으로 해결이 안 돼 포스코 출신전기제어 전문가라는 전문가는 퇴사한 사람까지 다 불렀고 설비를 공급한 유럽의 기술자는 물론 과거 인연이 있던 일본인 기술자, 심지어는 수맥탐지사까지 동원해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주택단지 내 부인회에서는 교단별로 기도회도 수없이 열었습니다. 잠이 오지도 않고 식욕도 없어서 구내식당에서 생맥주 한잔으로 식사를 대신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나 때문에 광양제철소가 문을 닫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 철강업이 이대로 끝장나는 것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맴돌았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설비사고의 원인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반장의 비인격적 대우에 불만을 품은 전기정비요원이 자기가 일부러 고장을 내고 자기가 수리를 하는 일을 반복한 것이었다. 이구택 사장의 아이디어로 투입한 입사동기이자 당시 선일기업 사장이던 이선종 사장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사고 6개월이 지나면서 혹시 사람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사장은 아예 그런 확신을 가지고 의심 나는 직원을 포항에 출장을 보내는 등의 방법으로 추적한 나머지 자백을 받아 낸 것이다.</p>
<p style="line-height: 150%;">그때 일을 계기로 한수양 부사장은 &#8216;기업은 사람이다&#8217;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씹게 되었다. 그는 조직 내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새삼 깨달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p>
<p style="line-height: 150%;">그는 조직 내에서의 리더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을 줄 아는 것이 가장 큰 덕목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미술을 했든 음악을 했든 철학을 전공했든 동료들의 마음을 모으고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을줄 아는 능력이 있다면 꼭 기술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제철소장직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어떤 신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이라고 말했다.</p>
<p style="line-height: 150%;">&#8220;수 많은 고생을 했지만 끝도 없이 일해볼 수 있는 기회가 저에게 주어졌다는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낍니다. 포스코에 재직하면서 같이 일했던 동료 한 분 한 분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요즘 포스코의 젊은 엔지니어들을 만나보면 세계 최고의 제철소를 가동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흐뭇한 마음입니다. 한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최고의 위치를 지켜나가는 데는 2인자의 위치에 있을 때보다 수십 배 수백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겸손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해낼 수 있습니다. 건투를 빕니다.&#8221;</p>
<p>우재욱&lt;시인·작가&gt;</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5/nam.png" alt="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width="450" height="137" usemap="#imgmap201852142921" /></p>
<p style="line-height: 150%;">
<map id="imgmap201852142921" name="imgmap201852142921">
<area alt="56편 이후 모아보기" coords="1,84,220,134" shape="rect" href="https://newsroom.posco.com/kr/tag/%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 target="_blank" />
<area alt="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coords="228,83,446,135" shape="rect" href="http://www.posco.co.kr/homepage/docs/kor6/jsp/news/posco/s91fnews002l.jsp?saveText=%B3%B2%B1%E2%B0%ED%BD%CD%C0%BA%C0%CC%BE%DF%B1%E2" target="_blank" /> </map>
</p>
</div>
]]></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남기고싶은이야기 89] 최광웅 前 부사장, 경영기획·정책 외길 34년 지속성장 토대 놓아</title>
				<link>https://dev-newsroom.posco.com/kr/%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89-%ec%b5%9c%ea%b4%91%ec%9b%85-%e5%89%8d-%eb%b6%80%ec%82%ac%ec%9e%a5-%ea%b2%bd%ec%98%81%ea%b8%b0%ed%9a%8d%c2%b7%ec%a0%95/</link>
				<pubDate>Thu, 10 Aug 2017 00:00:00 +0000</pubDate>
				<dc:creator><![CDATA[posconews]]></dc:creator>
						<category><![CDATA[사람과문화]]></category>
		<category><![CDATA[남기고싶은이야기]]></category>
									<description><![CDATA[포스코 입사가 일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 &#8220;고려대학교 통계학과를 졸업한 해인 1971년 3월 포스코에 공채 3기로 입사했죠. 입사 전 제일은행에 며칠 다니던 중 포스코 입사 확정 통보를 받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포스코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8221; 최광웅 전 부사장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div class="article">
<p>포스코 입사가 일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 &#8220;고려대학교 통계학과를 졸업한 해인 1971년 3월 포스코에 공채 3기로 입사했죠. 입사 전 제일은행에 며칠 다니던 중 포스코 입사 확정 통보를 받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포스코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8221; 최광웅 전 부사장은 인생이란 태어난 후 죽을때까지 매 순간 선택의 과정이라고 말하면서, 그중에서 포스코를 선택한 것은 그야말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right">
<tbody>
<tr>
<td align="center" valign="top"><a href="http://www.posco.co.kr/homepage/docs/kor5/dn/prcenter/news/namgi_89.pdf" target="_blank" rel="noopener"><img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08/btn_pdf_down.jpg" style="width: 100%;" /></a></td>
</tr>
</tbody>
</table>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
<div style="height: auto; border: 1px solid #d5d5d5; padding: 20px;">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left">
<tbody>
<tr>
<td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08/dot5.jpg" alt="따옴표 icon" width="100" height="100" style="margin-right: 10px;" /></td>
</tr>
</tbody>
</table>
<p><b> <span style="color: #3f699d;">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8216;남기고 싶은 이야기&#8217;를 연재합니다.</span> </b></p>
<p><b><span style="color: #3f699d;">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lt;편집실&gt;</span></b></p>
</div>
<p>&nbsp;</p>
<p><b>&#8211; 박태준 명예회장의 제철보국 경영철학을 경영기획·정책으로 구체화<br />
&#8211; 포스코 사회 공헌 전위대인 &#8216;포스코청암재단&#8217; 기획, 초기 성장 토대 다져</b></p>
<p>&nbsp;</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left">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08/020.jpg" alt="최광웅 전 부사장 주요 경력  1944 전북 김제 출생  1971 고려대 통계학과  1993 고려대 국제대학원 최고위과정  1996 스탠퍼드대 대학원 경영자과정(SEP)  1971 포스코 입사 총수요관리과장, 심사분석과장, 종합기획과장 경영정책부차장,  관리기획실장, 경영조사부장, 경영정책부장, 경영정책담당이사, 구매본부장, 인재개발원장,  경영기획담당 전무이사, 부사장(경영기획·재무·투자 부문)  2005 포스코청암재단 상임부이사장  2013 포스텍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 초대 소장  상훈 2003 국민훈장목련장" width="360" height="1074"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10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body>
</table>
<p><b><span style="color: teal;">포스코 입사가 일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span></b></p>
<p>&nbsp;</p>
<p style="line-height: 150%;">&#8220;고려대학교 통계학과를 졸업한 해인 1971년 3월 포스코에 공채 3기로 입사했죠. 입사 전 제일은행에 며칠 다니던 중 포스코 입사 확정 통보를 받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포스코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최광웅 전 부사장은 인생이란 태어난 후 죽을때까지 매 순간 선택의 과정이라고 말하면서, 그중에서 포스코를 선택한 것은 그야말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그는 입사 후 첫 보직으로 포항제철건설소 건설기획실 기획예산과에서 기획·예산 실무를 맡았다. 1972년 12월 31일 본사가 포항으로 이전한 후에는 경영정책실 조사통계과에서 국내외 철강업계 동향과 철강 수요산업별 철강수요패턴 조사 업무를 했고, 한국개발연구원(원장 김만제)에 파견되어 송희연 박사와 함께 철강수요 실제예측 업무를 수행했다. 그 후 2년 반쯤 판매부에서 근무하다 다시 경영정책실 총수요관리과장으로 승진했고, 이후 심사분석과장, 예산과장, 종합기획과장, 경영조사부장, 경영정책부장 등을 거치며 경영정보분석, 기획관리, 경영정책수립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8220;대한민국의 산업은 박정희 대통령 주도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산업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3가지 축으로 △3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KIST 설립 운영 △공무원들의 열정이라고 분석하고 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포스코로 치자면 박태준 회장의 강한 리더십 하에 열정적이었던 포스코인들의 제철보국정신, 응집력 그리고 철저한 경영목표 수립과 각 부문의 목표 초과 달성의 전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가운데 포스코 각 부문의 장단기 목표와 달성계획을 종합 수립하고 투자경제성을 철저하게 따져 결정하는 역할을 30년 동안 수행해왔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명예회장 등 30여 년간 여섯 분 회장 모시며 경영철학 구현 </span></b></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연극으로 업무적 한계에 다다른 직원들에게 전환점 마련해줘</span></b></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그는 박태준 회장의 경영방침에 따라 철저한 경영목표 수립과 목표 달성을 위한 진행 관리가 포스코의 성공 요인의 하나라고 회고했다.</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8220;저는 실무자로부터 시작해 30년 이상 경영기획, 정책 업무를 수행하며 포스코의 발전과정과 궤를 같이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1992년부터 2005년까지 13년간 임원으로 근무하며 박태준 명예회장, 황경노 회장, 정명식 회장, 김만제 회장, 유상부 회장, 이구택 회장까지 여섯분의 회장을 모시고 업무를 수행해왔습니다. 매월 열리는 운영회의, 경영환경변화 대응책 등 최고경영층에 보고하는 일도 많았지요. 핵심부서에서 근무하며 회사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해 스스로도 자랑스럽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경영정책부는 회사의 싱크탱크 집단에 해당한다. 그만큼 일도 많고 업무 강도 또한 높다. 일도 매뉴얼화된 통상적인 반복 업무가 아니라, 회사의 정책이나 경영전략 등을 연구하는 일이다. 뜬구름 잡는식으로 시작해서 타당성 있는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그래서 당시 최광웅 경영정책부장은 일에 빠져있는 직원들에게, 보기에 따라서는 생뚱맞기 짝이 없는 또 다른 일을 부과했다. 직원들에게 연극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다. 주제는 △고객과 포스코의 관계 △간부와 직원과의 관계 △현장과 본사와의 관계 등이었다. 연극이라는 게 쉽게 되는 게 아니다. 주제에 맞게 대본을 쓰고, 배역을 정하고, 연습에 연습을 거친 후에야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직원들은 입이 한자나 나왔다. 지금 일도 바쁜데 무슨 엉뚱한 연극이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장 지시를 거스를 수 없어서 조성식, 이형택, 이천석 차장 등이 주제별로 대본을 쓰고 전 직원 가족들을 관객으로 하여 공연을 했다. 임원회의에도 영상으로 보고했다.</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8220;반응은 예상외로 좋았습니다. 부장이 어찌 직원들이 바쁜지 몰랐겠어요. 사람이 일에 파묻혀 있다 보면 다른 건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 짜증이 늘어나고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게 됩니다. 경영학에 &#8216;한계효용체감의 법칙&#8217;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법칙은 이 경우에도 적용됩니다. 일도 한계에 다다르면 능률이 급격하게 떨어져요. 그때는 어떤 전환 요소를 만들어 주어야 해요. 연극 공연을 하고 나서는 연극에 빼앗긴 시간까지 합해서 더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게 되는걸 체험적으로 확인했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그는 이렇게 마음먹은 대로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박득표 부사장, 구자영 박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8220;박득표 부사장은 겉으론 딱딱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유연한 분이었습니다. 웬만한건 용인해주고 믿고 맡겨주셨어요. 직장에서 그런분을 상사로 만난다는 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최광웅 전 부사장은 과장 시절부터 박태준 회장의 지근거리에서 일을 했다.</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8220;1987년 6·29선언 이후 국내 정치가 불안해지고, 사회 전반에 걸쳐 기본 질서가 극도로 혼란해졌습니다. 격심한 노사분규가 일어나고 근로정신이 약화된 상황에다 급속한 원화절상 등으로 국가 경제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1989년 9월 저는 경영정책부장으로서 한국경제의 위기상황이 포스코 경영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서, 포스코의 대응방향과 포스코맨이 취해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이를 강력히 추진하도록 임원회의에서 보고했어요. 브리핑이 끝난 후 회장께서는 &#8216;잘했다&#8217; &#8216;수고했다&#8217;가 아니라 &#8216;감사하다&#8217;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감동적인 내용이라며 전계열사와 협력회사에도 교육을 시키라고 하셨어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그는 이렇듯 칭찬을 넘어 &#8216;감사하다&#8217;는 극찬을 받기도 했지만, 박 명예회장께 베세머재단과 포스코청암재단의 통합 필요성을 보고드렸을 때에는 포항 청송대가 떠나갈 정도로 혼이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을 잘 보필하려면 매 순간 긴장하고 사실 왜곡 없이 철두철미해야 했으며 가치있는 일을 해야 했다고 회고했다.</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8220;박태준 회장은 해외출장을 다녀온 후 임원회의에서 어김없이 저를 불러 세워놓고 해외상황, 해외 철강사 현황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습니다. 긴장되고 진땀이 나는 순간이 많았습니다.&#8221;</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이후 그는 박태준 회장이 해외출장을 나가시면 가능한 동선을 살폈다. 누구를 만나고 어느 단체와 접촉하는지, 어느 제철소를 방문하는지를 확인해 귀국 후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에 대비했다. 사전에 예상 질문과 나름 모범답안까지 준비해 두었다가 답변했다.</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8220;하루는 임원회의에 참석한 후 나오는데 당시 전순효 상무께서 &#8216;당신 회사에서 쫓겨나겠다. 회장께서는 일단 당신을 밟고 간 뒤에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시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또박또박 답변을 해버리면 정작 회장님은 하고 싶은 말씀을 못하게 되는 것 아니냐?&#8217;고 하셨어요. 그때 그 말씀을 듣고 직장생활의 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8221;</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최광웅 전 부사장은 예산과장, 심사분석과장, 종합기획과장, 경영정책부장 등 주로 선임 부서 직책보임자로 근무하다 보니 각 부서에 기초 자료를 받아서 종합해 기획하고 연도별 추진계획을 수립해 이를 경영상황에 따라 계획을 수정하는 롤링플랜을 만들고 진행·관리하는 일을 주로 했다. 그는 자신이 책임자로 깊숙이 수행한 일들이 포스코를 성장, 발전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했다.</p>
<p style="line-height: 150%;">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조직에서 성장하려면 상호 협력 통해 가치 있는 일 추진해야</span></b></p>
<p style="line-height: 150%;">
<p>&#8220;포스코 입사 후 경력이 쌓이면서 배우고 스스로 터득한 것이 있어요. 그것은 다름 아닌 조직에서 살아남으려면 △가치 있는 일에 대해 타부서로부터 협조를 잘 받아내는 일 △서로를 잘 이해하고 상호간 도움이 되게 처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생각과 과정을 밟고 나니 어떤 어려운 이슈가 주어져도 관계자의 협조를 받아내고 동료, 부하직원과 함께 최선의 안을 도출하거나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좀 더 생동감 있게 표현하자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토론하고, 부하들에게 미션을 적절히 부여하고, 중간중간 진행 관리를 해서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자신이 생겼습니다.&#8221;</p>
<p>&nbsp;</p>
<p>이러한 그의 자세 형성과 자신감을 갖게 된 배경에는 멘토의 역할이 컸다고 했다. &#8220;실무자 때는 송기환 계장, 차장 때는 이구택 부장, 부장 때는 박득표 부사장, 임원 때는 황경노 부회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분들 덕분에 전북 김제 평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제가 포스코에서 목표했던 부장(당시 부장은 기사 딸린 스카우트 전용 승용차를 운행했다)을 넘어서 과분하게 부사장까지 승진할 수 있었고, 국민훈장 목련장도 받을 수 있었지요.&#8221;</p>
<p>&nbsp;</p>
<p>그는 특히 포스코를 창업해 세계 최고 경쟁력의 철강사로 성장시킨 박태준 명예회장의 휘하에서 경영정책 업무를 수행하고, 명예회장이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으로 계실 때에는 상임부이사장으로 직접 보필하며 재단 운영 업무를 수행했다. 명예회장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포스텍 산하 박태준 미래전략연구소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으로 3년간 재임하면서 기초를 닦은 것이 일생의 큰 자랑이자 보람이라고 말했다.</p>
<p>&nbsp;</p>
<p style="line-height: 150%;"><b><span style="color: teal;">포스코청암재단 설립··· 포스코 사회공헌사업 체계화</span></b></p>
<p style="line-height: 150%;">
<p>2004년 10월 이구택 회장이 그를 불렀다. 이구택 회장은 포스코장학회를 근본적으로 탈바꿈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그 일을 그에게 맡기려고 했다. 당시 포스코장학회는 650억 원의 기금으로 포항, 광양 지역 고등학생 중심의 장학 사업에 치중하고 있었다. 재단 이사진도 지역 유력인사와 포스코 관계자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p>
<p>&nbsp;</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center">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08/b012.jpg" alt="최광웅 전 부사장(첫째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2005년 3월 31일 광양 백운산 수련관에서 포스코청암재단 출범 태스크포스 구성원들과 함께 첫 워크숍을 가서 찍은 사진 " width="450" height="486"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r>
<td style="padding: 5;" align="center" width="450">
<p align="left"><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최광웅 전 부사장(첫째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2005년 3월 31일 광양 백운산 수련관에서 포스코청암재단 출범 태스크포스 구성원들과 함께 첫 워크숍을 가졌다.</p>
</td>
</tr>
</tbody>
</table>
<p>&nbsp;</p>
<p>&#8220;당시 저는 관리담당 부사장(CFO)으로서 임기를 5개월 앞두고 있었는데, 이구택 회장이 포스코장학회 개혁업무를 맡기셨어요. 우선 기초 자료 조사와 국내외 벤치마킹을 담당할 실무 TFT를 만들어 수시로 토의와 협의를 하며 기본 개혁안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전 워싱턴 사무소장이었던 김진욱 부장과 양재운 팀장, 성낙연 팀장, 최종균 과장, POSRI 류희숙 박사, 이미애 사원 이렇게 6명으로 구성했지요. 재단 명칭은 세계적 기업인 포스코의 사회 공헌 전위대인 만큼 사명인 &#8216;포스코&#8217;와 이를 일궈낸 박태준 회장의 호(號)인 &#8216;청암(靑巖)&#8217;을 따서 &#8216;포스코청암재단&#8217;으로 정했습니다. 사업은 지역 장학사업에서 글로벌 포스코에 걸맞은 다양한 사업을 검토, 추진하기로 하고 이사진도 덕망과 경륜을 갖춘 전국적인 인사를 영입하기로 했습니다. 기금도 2000억 원 수준으로 확대하고 재단 소재지도 포항에서 서울로 옮기기로 했어요.&#8221;</p>
<p>&nbsp;</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center">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08/b021.jpg" alt="포스코청암재단의 2005년 9월 8일 출범식 단체 사진" width="450" height="406"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r>
<td style="padding: 5;" align="center" width="450">
<p align="left"><img src="https://s.w.org/images/core/emoji/11/72x72/25b6.png" alt="▶" class="wp-smiley" style="height: 1em; max-height: 1em;" /> 포스코청암재단이 2005년 9월 8일 출범했다. 이날 재단설립 이사회에서 이구택 회장(첫째줄 왼쪽에서 세 번째)이 재단 이사장, 최광웅 전 부사장(둘째줄 왼쪽 첫 번째)이 상임부이사장에 각각 선임됐다.</p>
</td>
</tr>
</tbody>
</table>
<p>&nbsp;</p>
<p>그해 10월 그는 포스코 부사장 신분으로 포스코장학회 개혁안을 포스코 이사회에 보고하고 승인을 득했다. 재단 개혁안을 기본으로 하여 국내외 사례를 조사하고 토의를 거듭해 구체적인 추진안을 성안했다. 2005년 9월 새로이 14명으로 구성된 재단 이사회에 추진안을 보고하고 역시 승인을 득했다. 재단 이사장은 포스코 이구택 회장이, 운영은 최광웅 전 부사장이 상임부이사장 직책을 가지고 맡기로 했다. 재단 사업은 아시아펠로십, 포스코청암상, 우수학생 장학을 필두로 NGO 해외연수, 스틸아트, 간병 등 총 6개 사업이었다.</p>
<p>&nbsp;</p>
<p>&#8220;포스코청암재단 사업 기본 구상 시 가장 중점을 두었던 사업은 아시아펠로십이었어요. 2005년 당시로선 아주 선도적인 사업이었죠. 아시아 각국과 무역 등 교류를 하고 동반성장 하기 위한 아시아 지역전문가 양성 사업, 아시아 우수학생들이 한국 유수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해 미국 풀브라이트 장학처럼 이들이 장차 교수, 공무원 등 각국의 지도자로 성장했을 때 한국의 우호 세력으로 한국과 소속 국가 간 가교 역할이 되어주길 기대하는 아시아 학생 한국 유학 장학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또한 아시아 학자들이 인문·사회과학 분야 이슈에 대해 연구하고 한자리에서 발표할 수 있도록 하는 아시아 인문사회 연구지원 사업과 아시아 문인들이 문학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아시아 계간지 발간 사업도 마련했습니다.&#8221;</p>
<p>&nbsp;</p>
<p>&#8220;포스코청암상은 박태준 회장이 포스코를 창업하고 경영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3가지 분야를 시상하기로 했어요. 국가와 사회에 대한 헌신과 봉사를 기리는 청암봉사상, 국가 발전의 주춧돌이 되는 청암과학상 그리고 청암교육상 이렇게 3개 분야로 정했어요. 권위에 걸맞게 전문성이 있는 선정위원장과 위원들이 독립적으로 선정하도록 시스템화했어요.&#8221;</p>
<p>&nbsp;</p>
<p>&#8220;포스코 창립 40주년인 2008년, 국가와 인류 사회 발전에 지속적으로 기여하는 공헌사업을 더욱 확대하기로 하고 박태준 명예회장을 이사장으로 추대했습니다. 박태준 이사장은 취임 후 포스코청암재단과 베세머수상기념재단의 설립자가 동일인이고, 설립 취지가 비슷하므로 두 재단이 합병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내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이에 따라 2009년 2월 19일 포스코청암재단은 베세머수상기념재단이 증여한 25억 4000만 원을 기본재산에 편입함으로써 합병을 완료했습니다.&#8221;</p>
<p>&nbsp;</p>
<p>&#8220;2009년부터 시작한 포스코사이언스펠로십은 박태준 회장이 각별히 챙긴 사업으로, 과학인재 육성 차원에서 기초과학인 수학,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분야를 연구하는 박사과정 학생, 박사후 과정, 신진 교수급 젊은 과학자를 선발해 이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성장을 돕는 프로그램입니다. 40대 중반의 소장 과학자로 구성된 1차 서류 심사위원회, 50대 저명 과학자로 구성된 2차 면접 심사위원회를 통해 대상자를 선정해 선발과정에 있어서도 전문성과 공정성을 높였어요. 또한 포항, 광양지역의 우수 고등학생을 지원하는 포스코샛별장학과 가정환경이 어려운 학생에게 학비를 지원하는 포스코비전장학 사업에도 내실을 기했어요.&#8221;</p>
<p>&nbsp;</p>
<p>2011년 3월 그가 재단에서 퇴임할 당시 사업은 포스코청암상, 아시아펠로십, 포스코사이언스펠로십, 포항·광양지역 장학 등 4대 사업이었다. 재단 기금은 2200억 원, 연간 장학사업 소요 예산은 100억 원 수준이었다.</p>
<p>&nbsp;</p>
<p>&#8220;세계적인 기업 포스코의 사회공헌 전위대의 위상과 박태준 명예회장의 명성에 걸맞게 사업 내용과 운영 수준을 관리해 왔고, 국내외에 널리 파급효과가 미치도록 노력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다고 자부합니다. 상임부이사장이 바뀌거나 담당 직원이 바뀌어도 지장이 없도록, 체계적인 시스템을 완벽하게 갖추어 놓았습니다. 재단 이사로 참여한 손지열 전 대법관이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도&#8217;이렇게 표준화되고 원칙대로 하는 재단은 처음 본다&#8217;고 하시더군요. 교육부와 과학기술부에서 벤치마킹을 오기도 했으니 재단 사업 내용과 운영 수준은 단연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8221;</p>
<p>&nbsp;</p>
<table border="0" cellspacing="3" cellpadding="0" align="center">
<tbody>
<tr>
<td class="link_figure" align="center" valign="top"><img class="thumb_g alignnone"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7/08/b03.jpg" alt="포스코청암재단 임직원의 다짐  1. 글로벌 포스코의 일선 사회공헌 수행자로서 열과 성의를 다하여 책무에 임하자.  2. 각 사업이 재단의 목적 및 본질에 충실하고 고객(수혜자)을 위하여 수행되고 있는지 항상 유념하자.  3. 글로벌 포스코 수준에 걸맞은 재단 업무 수행 능력을 지니며 업무 지침서를 수시로 점검하고 개선해 나가자.  4. 재단 펠로(Fellow)와의 유기적인 Network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에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재단사업의 효율을 배가하자.  5. 재단의 발전과 나의 인생항로를 잘 조화시켜 내 삶의 보람과 행복을 추구하자." width="450" height="233" style="margin-top: 5px; margin-right: 5px; margin-left: 5px;" /><a class="ico_news link_photo #body #photo #exted" href="#">이미지 크게 보기</a></td>
</tr>
</tbody>
</table>
<p>&nbsp;</p>
<p>&#8220;포스코장학회가 포스코청암재단으로 확대 출범한지 올해로 12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재단이 포스코 사회공헌의 전위대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스코그룹 가족은 물론 대외적으로도 좋은 인식과 평판을 얻을 수 있도록 초기 6년간 사업을 기획하고 운영했던 상임부이사장으로서의 책무와 성과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기회를 주신 박태준 명예회장과 이구택 회장께 감사드립니다.&#8221;</p>
<p>&nbsp;</p>
<p>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그는 포스코 후배들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박태준 전 회장은 투자의 타당성을 입체적으로 철저히 따져 적기에 투자를 했고, 적재적소의 공정한 인사를 했기에 오늘의 포스코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라는 말과 함께 기본의 실천, 공존의식, 윤리의식도 영원한 포스코의 가치이자 실천이념이라면서 퇴임 후 포스코를 지켜보는 OB로서 이러한 가치를 길이 계승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p>
<p>&nbsp;</p>
<p>&nbsp;</p>
<p><img class="aligncenter" src="https://newsroom.posco.com/kr/wp-content/uploads/2018/05/nam.png" alt="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width="450" height="137" usemap="#imgmap201852142921" /></p>
<map id="imgmap201852142921" name="imgmap201852142921">
<area alt="56편 이후 모아보기" coords="1,84,220,134" shape="rect" href="https://newsroom.posco.com/kr/tag/%EB%82%A8%EA%B8%B0%EA%B3%A0%EC%8B%B6%EC%9D%80%EC%9D%B4%EC%95%BC%EA%B8%B0/" target="_blank" />
<area alt="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coords="228,83,446,135" shape="rect" href="http://www.posco.co.kr/homepage/docs/kor6/jsp/news/posco/s91fnews002l.jsp?saveText=%B3%B2%B1%E2%B0%ED%BD%CD%C0%BA%C0%CC%BE%DF%B1%E2" target="_blank" /> </map>
</div>
]]></content:encoded>
																				</item>
			</channel>
</rss>